[단독] 오세훈의 ‘한국판 롯폰기힐스’ 무산?...‘세운지구 재개발’ 반쪽 위기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국판 롯폰기힐스’를 만들겠다며 추진 중인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 프로젝트가 금융 당국의 획일적 PF(프로젝트 파이낸싱) 규제 때문에 ‘반쪽 사업’으로 전락할 위기에 빠졌다. 서울시가 사업 방식을 변경한 탓에 부득이 대출을 연장해 온 알짜 구역이 ‘대출 4회 연장은 부실’이라는 정부 지침 때문에 공매에 넘어갈 처지가 된 것이다.
금융권이 7월 말 시행사를 상대로 PF 대출 회수를 예고한 가운데, 세운상가 일대를 고층 빌딩 위주로 고밀(高密) 개발해 서울의 랜드마크로 탈바꿈시킨다는 서울시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세운지구 통합 개발이 자칫 무산될 위기에도 서울시는 “민간 사업과 관련해 중앙 부처에 건의하기가 부담스럽다”며 팔짱만 낀 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획일적 규제와 지자체의 무책임한 행정이 빚은 촌극”이라고 평가한다.
9일 건설 업계에 따르면, 서울 중구 세운 재정비 촉진지구 3-3구역과 3-9구역에 총 3240억원의 브리지론(토지를 담보로 한 초기 사업 자금)을 빌려준 대주단은 최근 시행사인 한호건설에 “7월 말 만기인 대출 연장이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통보했다. 세운 3-3구역과 3-9구역 브리지론은 이번이 네 번째 만기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5월 발표한 ‘부동산 PF 사업성 평가 기준 개선 방안’에서 대출 만기를 4번 이상 연장한 사업장은 ‘부실 우려’ 등급으로 분류하고 공매를 유도한다고 밝혔다. 한호건설은 “두 구역은 애초 2017년과 2021년에 사업 시행 인가를 받고 개별 착공을 준비했는데, 서울시가 통합 개발로 방침을 바꾸면서 일정이 미뤄진 것”이라며 “서울시 심의를 기다리면서 대출을 계속 연장했는데, 이제 와서 부실 사업장으로 몰아가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PF 구조 조정에 한국판 롯폰기힐스 무산되나
세운지구 재개발 현장 중 PF 문제가 불거진 곳은 과거 을지면옥, 양미옥 등 유명 식당이 있던 자리로 지하철역(을지로3가역)과 붙어 있어 세운지구에서도 가장 입지가 좋다는 평가다. 시행사는 2021년 이미 사업 시행 인가를 받고 시공사를 선정해 공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2022년 3월 서울시가 “중대한 정책 변화가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요청해 사업을 일시 중단했다.
한 달 뒤인 2022년 4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녹지 생태 도심 재창조 전략’을 발표하고 세운지구를 선도 사업지로 지정했다. 잘게 쪼개진 구역을 묶고 건축 규제를 완화해 고층·고밀 개발을 유도함으로써 14만㎡에 이르는 녹지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서울시의 새 계획으로 건축 연면적이 늘어나게 돼 시행사로서도 이익이었다. 그러나 2023년 마무리된다던 인허가 심의가 계속 늦어졌다.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고, PF 시장이 경색되는 가운데 시행사는 추가 이자와 수수료만 1035억원을 쓰면서 대출 만기를 수차례 연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출 만기 4회 연장은 부실 사업장’이라는 금감원 기준 때문에 시행사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게 됐다. 7월 말 만기가 돌아오는 3-3구역과 3-9구역의 대출이 연장되지 않으면, 대주단이 땅을 공매에 부치고 세운지구 선도 사업지 개발이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간다.
◇”개별 현장에 개입은 어렵다”는 정부·서울시
대출 연장 횟수를 부실 판단 기준으로 잡은 것은 사업성이 떨어지는데도 이자만 내면서 버티는 ‘좀비 현장’을 솎아내려는 의도다. 하지만 세운지구는 이미 토지 확보가 70~90% 마무리됐고, 가장 까다로운 인허가 단계인 건축 심의도 마쳤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최고 43층인 대형 오피스 빌딩 4동(棟)이 들어선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서울 한복판을 고밀 개발하는 상징적 의미와 사업성이 좋다는 것을 대주단도 알고 있을 텐데, 금융 당국의 무리한 PF 구조 조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도 세운지구처럼 대규모 도시 개발이나 도시 정비 등 특수한 사업은 PF 평가에서 예외를 둘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다만 금감원 관계자는 “개별 건설 현장의 계약 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예외 여부를 금감원이 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예외 적용 여부는 돈을 빌려준 금융사들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사들은 정부가 제시한 ‘PF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한 증권사 PF 담당자는 “실무자가 (세운지구를) 예외로 인정했다가 혹시나 부실이 나면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니 금융사가 자발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란 지적도 나온다. 대주단과 대출 연장을 논의하기에 애를 먹는 한호건설은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민간 기업 간 계약에 시가 나서서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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