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넘어 한 무대서 만난 신·구 햄릿

이태훈 기자 2024. 6. 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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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개막 연극 ‘햄릿’의 배우 정동환·강필석

배우 정동환(75)은 1977년 처음 ‘햄릿’ 역할로 무대에 섰다. 9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의 햄릿 역 배우 강필석(46)은 1978년생이다. 정동환은 이번 연극에서 햄릿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의 원인 제공자,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로 강필석 ‘햄릿’과 함께 무대에 선다. 연기 경력은 55년, 22년으로 33년 차이. 두 배우의 햄릿 사이에도 거의 반세기의 간격이 있지만, 이들에게 이번 ‘햄릿’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와 같다. 개막 전 인터뷰를 두 배우의 대화로 재구성했다.

2024년의 '햄릿' 강필석(46·왼쪽)과 1977년의 '햄릿' 정동환(75) 배우. 정동환은 이번 햄릿에서 악당 숙부 '클로디어스'를 맡았다. /신시컴퍼니

◇”무대는 투쟁 아닌 서로 기대는 것”

강필석(이하 ‘’) “첫 대본 리딩이 안 잊혀요. 함께 무대에 설 선생님들 대사는 땅에 착 붙어 있는데 제 대사는 허공에 둥둥 떠돌았죠. 입을 떼는 순간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어요. ‘더럽고, 더럽구나’로 시작되는 첫 독백이 2박 3일처럼 길게 느껴졌고. 내가 안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정동환(이하 ‘’) “같이 노름해보면 상대를 안다고 하잖아. 같이 연기해보면 사람이 드러나거든. 난 필석이 처음 보고 이렇게 훌륭한 젊은 배우가 있었나 싶었어요. 기교로 상황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힘이 있어. 연극 무대는 싸워서 돋보이는 투쟁이 아니라 서로 돕고 기대는 거야. 그걸 깨우친 사람은 연기를 다 깨우친 거지.”

“2022년에 이어 두 번째 햄릿이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연출(연출가 손진책)님은 ‘익숙해질 때가 제일 위험하다. 멋 부리지 말고 초심 잃지 마라’고 하세요.”

“멋 안 부리던데 왜. 괜히 그러는 거야, 하하.”

연극 '햄릿'(2022)의 아버지 선왕의 유령 역 전무송(왼쪽)과 왕자 햄릿 역의 강필석. /신시컴퍼니

◇이해랑연극상 수상 배우만 11명

이번 ‘햄릿’엔 우리 연극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여줄 배우 24명이 참여한다. 정동환을 비롯해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김재건, 김성녀, 손봉숙, 남명렬, 박지일, 길해연 등 이해랑연극상 수상 배우만 11명이다.

“처음엔 정말 혈기로 부딪쳤던 것 같아요. 제 역할만 하기에도 급급했어요. 선생님들 연기를 보면 격정을 표현할 때조차 정제돼 있어 늘 놀라요.”

“지금 생각하면 첫 햄릿 땐 나도 그렇게 무모했어. 1977년 극단 현대극장의 ‘햄릿’에 참여했는데 다른 역이었다가 갑자기 햄릿 역할이 내게 떨어진 거야. 연극 개막을 미루면서까지 혈기로 덤벼들었지. 내가 이해 안 된다고 대사를 마구 쳐내기도 했으니까.”

“처음엔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하는 계획을 많이 세웠거든요. 지금은 대사와 상황만 이해하고 연습할 때 무대 위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의지하려고 해요.”

“바로 그거야. 배우에게 무대 위의 답은 늘 내가 무대 위에서 만나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 같아.”

◇”生死가 不二… 전혀 새로운 햄릿”

연극 '햄릿'의 햄릿 역 강필석(왼쪽)과 숙부 클로디어스 역 정동환 배우. /신시컴퍼니

“대관식에서 클로디어스가 연설할 때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도 함께 의자에 앉아 듣고 있잖아. 모두가 자기 삶의 업보 같은 걸 짊어지고 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뒤섞이고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지. 이번 ‘햄릿’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될 것 같아.”

“배우인 저도 한 번 구현했던 캐릭터를 벗어나기 힘들거든요. ‘햄릿’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거라곤 상상 못했어요. 이 무대는 죽지 않을 것같이 계속 살아가지만 결국 누구나 다 죽는다고, 영원할 것 같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작은 배역, 나쁜 배역은 없어. 작은 배우, 나쁜 배우가 있을 뿐. 각자 일가를 이룬 배우들이 배우1·2, 무덤파기 같은 작은 역할까지 맡아 몸을 던지니 극 전체의 기운이 달라지는 것 같아.”

“저도 그걸 느껴요. 이 무대는 빈틈이 없어요. 햄릿이 날뛰고 놀아도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고 다 잡아주시는 기분. 관객 분들에게도 이 느낌이 전달되겠죠?”

“그럼. 연극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이 중요해. 작은 배역을 맡은 분들의 연기를 보며 작다고 생각했던 그 역할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되겠지. 우리 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작품을 하며 더 길게 오래 배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난 여전히 애송이구나, 아직 걸음마도 시작 안 한 거였구나. 배우로서 더 올라야 할 산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꿈이 생긴 것 같아요.”

“배우에게 연극은 영원히 죽지 않을 영원한 종교와 같지. 다시 못 돌아올 줄 알면서도 길을 가는 것, 그 길 위의 고통을 숭고하게 여기는 것, 그게 인생과 연극의 공통점 아닐까. 지금은 삭아버린 불덩이처럼 침묵하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날이 올 테니까.”

공연은 9월 1일까지, 6만~9만원.

2024년의 ‘햄릿’ 강필석(46·왼쪽)과 1977년의 ‘햄릿’ 정동환(75) 배우. 정동환은 이번 햄릿에서 악당 숙부 ‘클로디어스’를 맡았다. /신시컴퍼니

☞정동환(75)·강필석(46)

전국학생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고1 때부터 정동환(75)에게 연극은 “영원히 죽지 않을 종교”가 됐다. ‘낯선 사나이’(1969)로 데뷔한 뒤 ‘하멸태자’ ‘레이디 맥베스’ ‘고곤의 선물’ ‘두 교황’ 등에 출연한 우리 연극 대표 배우. 2009년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강필석(46)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번지 점프를 하다’ ‘스위니 토드’ 등 뮤지컬로 널리 알려진 배우. 2022년 연극 ‘햄릿’ 주연을 맡은 걸 “내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말한다. 2021년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자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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