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단체기합식 R&D 예산 삭감… 이공계 생태계엔 치명타”

이진영 논설위원 2024. 6. 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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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초대석]김영오 서울대 공대 신임 학장
서울공대 이탈자 역대 최대 우려… 산업계 인재가뭄 극심해질 것
‘묻지마식’ R&D 예산 일괄 삭감… 남들 뛰는 동안 우린 멈춰 선 것
입시 자율화로 진짜 공학도 뽑고… 수도권 대학 이공계 증원해야
김영오 서울대 공대 학장은 “요즘은 공학기술을 모르고 국정과 세계 정세를 논할 수 없고, 거꾸로 지정학과 지경학을 모르는 공학 리더십도 있을 수 없다”며 “미래는 불확실을 넘어 ‘극단적으로 불확실한(radically uncertain)’ 시대여서 대학에서의 폭넓은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의대 증원 확정으로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는 폭풍 전야다. 올해 입시에서 의대 입학정원은 1540명 증원돼 4695명이 됐다. 서울대 이공계 정원(1775명)만큼 늘어나 상위 4%인 이과 1등급은 원하면 모두 의대에 갈 수 있을 만큼 문호가 넓어졌다. 일찌감치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한 학생들에 이어 2학기엔 본격적인 ‘이공계 엑소더스’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수 삼수해 대학 간 학생들이 삼수 사수를 준비 중이고, 대기업 신입사원 중에도 “지금 들어가도 남는 장사”라며 N수 대열에 합류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미 연구개발(R&D) 예산 일괄 삭감으로 쑥대밭이 된 이공계는 학생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이달 1일 취임한 김영오 서울대 공대 신임 학장은 “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이 연이어 터지면서 과학기술 인재 양성 생태계의 근간이 위협받고 있다”며 “신임 학장으로서 공학교육혁신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1순위 과제”라고 했다.》


―의대 증원이 있기 전에도 이공계 이탈 문제가 심각했다. 서울대 공대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공대 입학정원은 812명으로 서울대 전체 입학 정원(3300명)의 4분의 1이다. 2000년 이후 서울공대 자퇴 및 제적생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반 100명이 넘다가 노무현 정부 때 과학기술부총리와 과학기술수석실이 신설되고 이공계 장학금 같은 진작책이 시행되면서 30∼40명 선까지 떨어졌다. 2019년부터 다시 상승해 지난해 100명을 넘겼는데 내년에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울까 매우 우려된다.”

―입시학원 자료를 보면 2000학년도만 해도 자연계열 합격선 상위 20개 학과 중 7개 학과가 서울대 공대 학과였다. 그런데 2024학년도엔 20개 학과 모두가 의대나 치대다. 올해 입시에선 1등급은 모두 의대 가고 2등급부터 공대를 채울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커트라인이란 입학 최저 점수여서 공대 입학생 전체 성적을 대변할 수 없다. 공대에는 수학 잘하고 만들기 좋아하는 재능 있는 젊은이가 여전히 많이 온다. 커트라인 변화보다 훨씬 신경 쓰이는 문제는 서울공대 입학을 의대 진학을 위한 재수의 안전판 정도로 여기는 학생들이다. 공학도를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의대 N수생 때문에 떨어지는 병폐만은 없어져야 한다.”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빈자리는 어떻게 되나.

“공학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편입학 제도로는 어렵다. 공대는 전공마다 특정 산업과 관련돼 있어 모든 학과가 관련 산업에서 활동할 최소 인원을 배출해야 한다. 서울대 공대 입학정원 812명 중 이탈자 100명이면 10%가 넘는다. 임계값(tipping point)에 가까워지면 작은 변화가 큰 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의대 증원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갈 것 같나.

“최소 2∼3년간 상위권 공대는 이탈 학생 문제로 매우 힘들 것이 확실하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국가적으로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어 말을 아꼈는데 의대 정원이 확정됐으니 의료계라는 ‘나무’만 보지 말고 이공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 ‘숲’을 보는 정책을 세우길 건의한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과학계 카르텔 척결을 위해 “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올해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들어 전년 대비 14.7% 삭감됐다. 총액은 26조5000억 원으로 정부 총지출의 3.9%다. 계약직 신진 연구자들이 줄줄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연구의 대가 끊겼다는 탄식이 나온다.

“R&D 예산 체계에 수술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일괄 삭감이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벌을 줘야 하는데 단체 기합 식으로 반찬 개수랑 식사량을 전부 줄인 모양새가 됐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문제의식에 비해 이를 집행하는 예산 관련 정부 기관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질적 경직성도 일괄 삭감을 초래한 주요 요소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던 학생과 신진 연구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고 방황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것이다.”

―서울공대의 연구비는 어느 정도 줄었나.

“평균 25% 삭감된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실마다 연구생 인건비를 최대한 살리려고 연구 기자재 구입, 국제 학회 발표 같은 연구활동비 순으로 대폭 줄였다. 연구와 교류가 중단된 것이다. 다른 나라는 뛰어가는데 우리는 멈춰 서 있다.”

―내년에는 R&D 예산을 대폭 늘린다고 한다. 1년 예산이 깎인 것이 그렇게 치명적인가.

“1∼2년의 기술격차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공학과 산업에 매우 ‘광범위한’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이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2023년 한국 산업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인 미국의 88% 수준이고 이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0.9년이다. 미국은 아무것도 안하는 동안 우리가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열심히 연구하면 1년도 안 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학과 산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만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있다. 2023년 한국 디스플레이 분야가 유일하게 세계 최고이나 고작 6개월 차이로 앞서고 있다. 조만간 디스플레이마저 1위 자리를 뺏기고 다른 분야의 기술 격차도 더 뒤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울공대 연구 주제의 상당 부분이 탄소중립이나 미래 에너지 이슈와 관련돼 있다. 2050년 탄소중립 달성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R&D 예산 삭감의 여파가 얼마나 오래갈까.

“과학기술수석실이 생겼고 내년엔 관련 예산이 역대 최대가 된다니 기대가 크다. 유행을 타지 않는 기초 연구 분야가 홀대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연구자 이탈, 사기 저하, 연구 연속성 단절 등으로 연구 생태계 내부 상처는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과학기술 인력 수요가 연평균 5.3% 늘어나는 동안 이공계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 증가율은 3.6%에 그쳤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데 관련 분야 인재 가뭄이 심각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대학 입시와 수도권 대학 이공계 증원에 관한 매우 견고한 규제를 일부라도 풀어주길 건의한다. 입학 사정 단계에서 공대를 의대 진학을 위한 정거장으로 여기는 아이들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현행 전형 자료나 구술고사 방식으로는 어렵다. 특목고나 서울 강남 학생들을 더 많이 뽑으려고 입시 자율권을 달라는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공학을 열망했던, 지금도 공학을 즐기는, 공학이 왜 좋은지 가르쳐주면 그걸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학생들을 선발하겠다는 뜻이다. 이공계 최우수 학생들의 병역 특례와 공학도의 생애소득, 고용안정, 보상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했으면 한다.”

―어느 대학 총장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은 정책 실패’라고 했다. 기술패권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 정책 실패의 아쉬움이 크다.

“과학기술 정책이 정쟁화하는 것도 문제다. 에너지 분야를 예로 들면 원전, 신재생 에너지, 영일만 유전까지 정쟁화 이슈가 많아지고 그 폭도 넓어지는 것 같다.”

―영일만 유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제 연구 분야 중 하나가 불확실성하에서의 의사결정이다. 저출산은 미래가 뻔히 보이는 확실성이 큰 이슈이지만 기후변화나 영일만 유전 개발은 불확실성이 크다. 이런 정책 추진은 어둠 속에서 운전하는 것과 같다. 대낮에 기어가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어두울 때 마구 달리다간 사고 난다. 더듬더듬 조금씩 나가면서 이쪽이 아니다 싶으면 저쪽으로 방향을 바꿔 가며 가역적인 정책을 써야 한다. 희망 고문하며 비가역적인 정책으로 가다 석유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이번 일로 석유 탐사 산업이 좌초될까 걱정된다.”

―40년 전 학장께서 대학 다닐 때와 비교하면 요즘 학생들은 어떤가.

“예전에 고교생들에게 서울공대 설명회를 하다 놀란 적이 있다. 학생들이 의대 가면 여러 고민할 필요가 없어 좋다고 하더라. 예과 본과 인턴 레지던트 그대로 쭉 따라 올라가다 마지막에 개업할 거냐, 종합병원에 남을 거냐만 정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대 들어오면 교수도 되고 노벨상도 타고 장관이나 CEO도 될 수 있다’고 했는데 핀트를 완전 잘못 맞췄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불확실성이었다! 안정된 미래에 집착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자동차, 반도체, 컴퓨터가 그러했듯 청년들이 사회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력을 느끼는 기회를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김영오 서울대 공대 학장(58)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 서울대와 미국 워싱턴대에서 토목공학으로 학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NASA 박사후 연구원을 거친 수자원공학 및 기후변화 분야 전문가. 아시아오세아니아지구과학회(AOGS) 수문과학 섹션 회장으로, 서울대 학생처장과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대표를 지냈다. ‘수월, 융합, 창의를 지향하는 학문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하며 32대 서울대 공대 학장에 선출됐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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