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움벨트'(Umwelt) [삶과 문화]

2024. 6. 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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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사는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2023년 작품으로, 제76회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휘관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이 수용소 바로 옆에서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회스 가족의 집은 수용소의 울타리와 인접해 있지만 그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의 참상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차단하고, 마치 평화롭고 안락한 낙원에 있는 듯한 삶을 살아간다.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불리는 안주인 헤드윅 회스는 집 안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벽 너머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움벨트(Umwelt)는 독일어로 '환경'을 의미하며,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이 그의 1934년 책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감각 기관과 인지 체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고유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즉, 각 생 명체는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상을 통해 고유한 주관적 현실을 살아가며, 이는 동일한 객관 적 환경에서도 서로 다른 경험과 인식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사람과 개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사람이 경험하는 세상과 개가 이해하는 세상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각각의 움벨트가 있고, 그 인식의 틀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회스 가족의 움벨트로의 아우슈비츠는 안락함과 행복이 가득 찬 천국 같은 곳이다. 반면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은 전혀 다른 움벨트를 경험하고 있다. 그들의 움벨트는 끊임없는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회스 수용소장의 관사는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뒤에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노역과 끔찍한 학살이 존재한다. 가족은 자신들의 천국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사실을 철저히 무시한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환경에 따라 인식을 달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이며,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이 영화는 해나 아렌트가 제안한 '악의 평범성' 개념과도 깊이 연결된다.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을 제안하며, 거대한 악이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영화에서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도 놀랄 만큼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승진에 목을 매고, 평판과 허영과 욕망에 충실하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수용소의 끔찍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소리와 분위기를 통해 그 공포를 전달한다. 이는 관객이 회스 가족의 시선을 통해 수용소의 유폐된 현실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가족의 일상적인 소리와 함께 ASMR처럼 들리는 수용소의 비명소리, 밤새 타 오르는 연기 등은 관객에게 두 세계가 벽 하나로 가까이 있지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체감하게 한다. 반면 영화 속에는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느끼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폴란드 소녀는 야음을 틈타 수용소의 재소자들의 노역장에 몰래 사과를 숨겨놓는다. 끔찍한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갓난아이는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공포를 느낀다. 이들은 자신들의 움벨트 안에서 고통받은 타인들의 움벨트와 공명하고 있다.

영화는 회스 가족의 안락하고 아름다운 생활 뒤에 가려진 수용소의 지옥 같은 현실을 통해, 각성 없는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로써 관객은 인간의 무감각함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인간은 자신의 움벨트를 넘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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