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기는 눈물을 타고 또 다른 밀양으로 흐른다

이홍근 기자 2024. 6. 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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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행정대집행 10년…아물지 않은 ‘국가 폭력의 상처’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고정마을에 115번 송전탑이 설치돼 있다. 정효진 기자
주민들 반대에도 송전탑 강행
보상 둘러싸고 마을 갈라져
“전기소리, 그날 군홧발 떠올라”
윤 정부, 원전 확대 정책으로
여전히 지역에만 희생 강요

농성장의 적막을 깬 건 ‘쿵쿵쿵’ 소리였다. 김영순 할머니(70)는 고개를 떨구고 쇠줄로 묶인 가슴을 바라봤다. 심장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 해 전 송전탑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나무를 잡고 버티다 굴착기에 나무뿌리째 실려 나간 경험도 있는 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시선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골길을 가득 메운 경찰의 군홧발 소리였다.

2014년 6월11일 새벽, 다리가 아파 농성장에 오르지 못한 정용순 할머니(76)는 자꾸만 김 할머니가 눈에 밟혔다. 전날 초저녁에 농성장으로 올라간 음식은 빵 60개, 우유 60개가 전부라고 했다. 급한 대로 김밥을 말아 산을 오르는 수녀들의 배낭에 밀어넣었다. 정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건 마당에 나와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행정대집행은 신속했다. 경찰은 자신을 농성장에 묶은 할머니들을 뜯어내고, 자르고, 날랐다. 철컥, 쿵, 쾅 하는 굉음들 사이에서 인간의 소리는 할머니들의 비명뿐이었다. 웅덩이가 되어버린 농성장을 보며 할머니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울부짖었다.

행정대집행으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 농성장 자리엔 115번 송전탑이 “비석처럼” 세워져 있었다. 송전탑은 ‘웅웅웅’ 소리를 내며 전기를 옮길 뿐이었지만, 고정마을 주민들은 송전탑에서 자꾸만 ‘쿵쿵쿵’ 하는 군홧발 소리를 들었다. “아들이 그래요. 저 철탑은 우리를 따라다니는 거냐고. 마을만 들어오면 어디서든 보이니께는.” 김 할머니는 창문 너머로 송전탑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이어 “어떻게 잊겠냐. 전기 쓰는 서울 사람들이야 까먹겠지마는. 나는 자꾸 눈물이 나서…”라고 했다.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서게 된 것은 한국전력이 ‘765㎸(킬로볼트)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다. 울산 울주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나르기 위해선 대규모 송전탑이 필요했다. 수도권의 지방 착취라는 논란이 일자 한전은 종착지를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로 변경했다.

2005년 5월 초고압 송전선로가 마을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밀양 주민들은 반대 투쟁에 나섰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송전탑 노선을 바꾸거나, 지하화해달라는 것이 주민들의 요구였다. 정 할머니의 남편 안병수 할아버지(75)는 “아는 한전 직원이 송전탑 얘기를 듣더니 ‘이유 불문하고 얼른 떠나라’고 했다”면서 “전자파가 그만큼 유해하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2014년 농성장이 철거될 때까지 주민 요구는 같았지만, 한전은 사업성을 이유로 건설을 강행했다.

주민들은 송전탑을 ‘과거의 흉터’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딱지조차 내려앉지 않은, ‘지금도 피 흘리는 상처’라고 했다. 송전탑 건설은 완료됐지만, 공사 과정에서 갈라진 마을 공동체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 할머니는 “한전이 사업에 찬성하는 주민들에게만 개별 지원금을 주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갈라졌다”면서 “어느 집은 얼마를 받았다는 식으로 한전 직원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냈고, 서로를 의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핵 발전을 멈춰라” 미래 세대의 외침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10년맞이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지난 8일 경남 밀양시 용회마을에 설치된 102번 송전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삶터 짓밟는 폭력적 에너지 구조 바꿔야”

고정마을은 송전탑 반대 과정에서 제초제를 먹고 목숨을 끊은 유한숙씨가 살던 마을이기도 하다.

안 할아버지는 “유씨가 죽고 얼마 안 있어서 그 아들도 자살했다”면서 “한전과 보상 문제로 소송하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을 분위기가 어떻겠냐”고 말했다.

송전탑으로 인한 전자파와 소음 탓에 농사를 포기한 이도 있었다. 이날 찾은 115번 송전탑 옆 자두밭은 버려진 채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송전탑과 가까운 나무는 바짝 말라 비틀어져 열매조차 맺지 못했다. 안 할아버지는 “자두 끝에 전자파 측정 장치를 달아 조사했는데 높은 수치의 전자파가 확인됐다”면서 “주인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과수원을 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경남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를 포함한 197개 단체, 1500여명의 시민들은 밀양 송전탑 6·11 행정대집행 10년째를 맞아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에 모였다. 10년 전 전국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에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탑승했던 ‘밀양행 희망버스’가 재현된 것이다.

이날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31일, 핵 폭주를 실현할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을 발표했다”면서 “또 다른 밀양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은정 기후위기비상행동 운영위원장은 “삶터를 저당 잡혀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를 또 실어 나르기 위해 수백킬로 떨어진 곳의 피해를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부정의한 에너지 구조는 이제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는 핵발전소 4기를 더 짓고 게다가 2038년까지 그 어떤 노후 핵발전소 폐쇄도 없이 총 30기를 가동하겠다는 ‘에너지 탐욕’을 보여주었다”면서 “기후위기를 심화시킴은 물론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밀양을 반복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주 월성원전 주변에 사는 주민 황분희씨는 “핵발전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아니다”라면서 “발전소가 내뿜는 방사능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피폭된 상태다.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 |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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