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전문직 윤리와 노동권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발표로부터 촉발된 ‘의·정 갈등’이 진정될 기미는커녕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동안 진료 현장을 떠나 있던 전공의들에게 정부가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의대 교수들이 휴진을 결의했고 대한의사협회도 파업을 고려 중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은 ‘의·정’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시민들의 처지를 내다본 조상의 혜안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 선서는 ‘의사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이 되지는 못한다. 사실 히포크라테스 시절에는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던 문제였다. 오늘날 의사들은 그때와 달리 국가와 시장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조직 안에서 일한다. 공공이든 사립이든 병원에서 ‘피고용인’으로 일을 하고, 독립적인 개원 의사라 해도 건강보험, 의료법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규제 안에서 진료를 한다. 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교육과 의료 서비스의 질적 표준에서 연구·개발에 이르기까지, 의료의 모든 영역은 ‘사회적으로’ 통제된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타 피고용인이나 자영업자들과 달리 의사들은 전문직으로서 사회 내에서 상당한 자율성과 특권을 갖는다. 여기에는 그러한 자율성과 특권을 타인의 복리, 즉 환자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계약’이 존재한다.
의료 서비스의 사회화, 시장화가 가속되면서 의사직의 피고용인,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는 추세이다. 파업을 비롯한 의사 집단행동은 한국만의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의사 파업, 특히 젊은 수련 의사들의 근무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잇따르고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도 늘고 있다. 세계 의사윤리강령이 제시하듯,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시절처럼 개별 환자의 건강과 복지만이 아니라 인구집단과 미래세대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건강과 복지에 기여할 책임도 있다. 환자를 대리하여 더 나은 보건의료체계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 비춰볼 때, 현재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몇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서 정하고 있는 단체행동이나 쟁의 절차와는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법적 절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투쟁 강도를 높여 파업에 이른 경우에도 흔히 ‘불법’ 딱지가 붙는 것이 그동안의 노동자 파업이었다면,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불법이라기보다 ‘무법’ 상태에 가깝다. 또한 표면적으로라도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료 현장을 떠났던 전공의들의 면책을 요구하며 교수들이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동업자에 대한 신의를 강조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마저 뛰어넘는 내용이다. 의사들이 가진 사회적 힘이 크다고는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도 의사 집단행동의 성패는 대부분 여론, 시민들의 지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보건의료 종사자와 시민은 더 나은 보건의료 서비스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맹군이 될 수 있고, 시민을 설득해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하지만 지금 시민들이 동맹군은커녕 인질 취급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어떤 동기에서든 의사들의 집단행동, 특히 파업 같은 진료 중단 행위는 환자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정당성과 보완책이 따라야 한다. 2012년 세계의사협회가 발표한 의사 집단행동의 윤리에 관한 권고는 의사가 집단행동에 참여하더라도 환자에 대한 윤리적·직업적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Do no harm”)는 의료윤리의 제1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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