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배구여제 김연경

김광호 기자 2024. 6. 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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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이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국가대표 은퇴식에서 등번호 ‘10번’을 담아 만든 기념액자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김연경이 성인 여자배구 무대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것은 고3인 17세 때였다. 2005년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에서 단숨에 대표팀 왼쪽 주포로 전체 득점 3위에 올랐다. 192㎝ 역대 최장신 스파이커의 출현이었다. 그해 겨울 흥국생명에서 국내 프로리그에 데뷔한 그는 전년도 꼴찌이던 팀을 정규시즌·챔피언결정전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MVP·신인상 등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시작부터 그는 ‘제왕’이었다.

김연경이 지난 8일로 16년 국가대표를 온전히 마감했다. 3년 전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코로나19로 은퇴 경기가 뒤늦게 열렸다. 김연경이 ‘배구여제’로 불린 것은 압도적 실력 덕이다. 국내와 일본·튀르키예·중국 등 4개국 리그와 국가대표 경기에서 10년 넘게 세계 최고 공격수로 군림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MVP에 오르며 36년 만에 4강 신화를 썼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안겼던 여자배구 역사의 부활이었다.

김연경은 중학교 때까지 키가 170㎝도 안 돼 세터나 리베로로 경기를 뛰었다. 배구를 그만둘 고민도 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20㎝ 이상 자랐다. 세터·리베로를 두루 경험했으니 기술이 탁월할 수밖에 없다. 압도적 실력과 강한 승부욕, 카리스마는 ‘배알못’들까지 배구로 이끌었다.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내뱉는 욕설이 애칭(식빵 언니)으로 승화될 만큼 대중의 사랑은 컸다. 하지만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후 그가 “김치찌개로 회식했다”고 토로할 만큼 여자배구의 현실은 열악했다.

한국 여자배구는 지금 연패의 침체에 빠져 있다.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른 구기종목들과 다를 바 없이 저출생 여파로 선수 자원이 감소하고, 엘리트 체육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영향도 있다. 김연경은 재작년 언론 인터뷰에서 ‘제2의 김연경’론에 대해 “1명만 기다리는 건 요행이고 바람직하지 않다.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며 쓴소리를 했다. 그는 9일 ‘김연경 초청 세계 여자배구 올스타전’에 앞서 유망주 지원을 위한 ‘KYK 재단’ 설립을 발표했다. 그의 바람대로 특출난 1명이 이끄는 배구가 아니라 한국 배구 전체가 강해지는 르네상스의 도래를 기대해본다.

김연경이 9일 서울 송파구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재단 ‘KYK 파운데이션 출범식’에서 유소년 배구 발전 후원 물품 전달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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