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 없는 피해 [프리즘]

방준호 기자 2024. 6. 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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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리셋’(ReSET)과 ‘교대역 엔(n)번방 규탄 지하철 광고팀’이 진행한 ‘릴레이 포스트잇 주간’ 당시 서울 교대역에 붙은 스티커와 포스트잇. 리셋 제공

방준호 | ​이슈팀장

질문은 역순이었다. 미안함과 모종의 두려움 탓에 피해를 처음 인지했던 2021년 7월, 그날의 기억을 인터뷰 막바지에 물었다. 그는 서울대 불법 합성물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이자 최초 신고자였다.

그날, 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소개 사진이 합성·편집돼 성범죄물이 되어 퍼지고 있는 걸 알았다. 텔레그램에서 이름 모를 가해자는 3시간째 합성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피해자가 말했다. “비유하자면 누군가 뒤에서 나를 세게 때려요. 뒤돌아봐요. 그런데 아무도 없어요.” 얼굴 없는 가해자에게 쫓겨 피신하듯 경찰서로 갔다. “텔레그램은 잡기 어렵다는 얘기, 원한 관계가 있을 만한 남성이 없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어요. 마치 직접 가해자를 찾으라는 것처럼. 별일이 아닌 것처럼.”

당시 느꼈을 그의 두려움과 당혹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가만 듣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났다. 피해 자체도 소름 돋았지만, 합리적인 피난처라고 믿고 달려간 법 집행기관의 심드렁한 모습이 한층 무서웠다. 고통은 명백하고 현재 진행 중인데, 이를 내보이고 설명해도 엉뚱한 되물음과 답변만 듣는다. 당연히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고통을 아무리 설명해도 법과 제도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조리’의 한가운데, 그는 놓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여가 흐른 2024년, 뒤늦게 붙잡힌 서울대 불법합성물 성범죄 피의자의 혐의는 성폭력처벌법 14조의2(허위영상물 등의 반포 등) 등이었다. 텔레그램 성착취물 사건을 겪고 2020년 3월에야 만들어진 법 조항이다. 경찰과 검찰은 이를 심각한 잘못으로 여긴 것 같지 않다. 불송치와 불기소가 이어졌다. 물리적인 폭행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합성되거나 편집된 허위 영상물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사이 합성물 제작 기술은 발달했다. 에스엔에스에 사진을 올린 모든 시민이 합성 성범죄물의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는 지경이다. 사건에 적힌 범죄의 배경 ‘서울대’는 명문 대학이 아니라, 일상적이며 평범한 모든 공간이라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혐의, 법이 인정하는 잘못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그제야 곰곰이 생각했다. 상식적인 고통이, 상식의 표상으로 여겼던 수사와 사법의 과정에서 진지한 혐의로 여겨지지 않을 때 피해자가 느끼는 공포에 관한 것이다.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 끝내 스스로마저 의심하게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을까. 현실적이고 꼼꼼한 제도에 대한 묘사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황당하고 초현실적인 일들이 천연스럽게 맞붙어 악몽 같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카프카 소설이 떠올랐다. 현실에선 이런 부조리 속에 가해와 피해는 흔해지고 끔찍해진다.

4월 경남 거제에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과 수서의 한 오피스텔에서 결별 살인이 벌어졌다. 입법조사처가 4일 발행한 ‘거절살인, 친밀한 관계 폭력 규율에 실패해 온 이유’(허민숙 입법조사관) 보고서는 교제 살인·폭력 피해자 대부분이 전조처럼 겪는 ‘강압적 통제 행위’를 규율할 ‘혐의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짚었다. 강압적 통제 행위는 상대방의 일상에 대한 간섭과 규제, 모욕 주고 비난하기,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등의 행위를 이른다. 이에 대해선 법적 규정조차 없다. 피해는 있는데 혐의는 없는 상황을 보고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강압적 통제의 양태인) ‘그런 식으로 옷 입지 마라’,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사진 찍어 보내라’, ‘영상 통화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 ‘그 모임에 나가지 마라’, ‘누구와 카톡을 주고받았는지 확인해야겠다’, ‘다른 사람과 만나지도 말고 대화도 말라’가 해악의 고지인 협박죄로 인정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강압적 통제 피해자가 공포심에 떨며 낱낱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재판장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한편의 부조리극 같은 장면. 피해자가 적잖으며, 끔찍한 강력범죄로 이어진 현실의 부조리라는 점에서 책장을 덮고 훌훌 털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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