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산재보험은 ‘규제 암덩어리’가 아니다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6. 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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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중 사자가 덤벼들자 급하게 나무 위로 피신하는 고 박환성 피디. 현지 코디가 찍은 사진. 박환성 피디 페이스북 갈무리

지원준 | ​독립 피디

나는 고소공포증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그래서 생업과 관련이 없다면 절대 등산을 하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서 시원함이 아니라 공포감을 느낄 정도다. 지금은 사라진 ‘브이제이(VJ) 특공대’라는 방송을 맡고 있었던 2002년 겨울. 영종대교 관리자들을 촬영하러 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여분의 추락방지 안전블록이 없어 나는 맨몸으로 올라야 했다. 지금이야 관리업체에서 안전장비 없이는 못 올라간다고 버티겠지만 20년 전에 그런 인식이 있었겠는가? 현수교 기둥 내부의 통로를 한참 타고 올라가 드디어 영종대교 꼭대기에 머리를 내밀게 됐는데,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카메라를 들고 일어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일어나면 날아간다.’ 다행히 촬영은 무사히 마쳤지만, 그때 시작된 고소공포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독립 피디(PD)’가 뭐 하는 직업인데 저러나 궁금하실 테다. 방송계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연출자를 떠올리시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외주제작 현장에서 주로 일하지만, 방송사 내부에도 상당수의 독립 피디들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안 가는 곳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위험한 곳도 다니게 되고 사건·사고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분이 소위 프리랜서라, 그 위협에 대한 안전관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처구니없는 장면은, 동료 피디가 분쟁지역 촬영 중 전선을 향해 기동 중인 티(T)-72 전차를 배경으로, 방탄모도 방탄조끼도 없이 스탠딩을 한 장면이다. 당시 그는 방송사 내부의 프리랜서였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방송사 관계자가 ‘알아서 하라’고 했단다. 분쟁지역뿐만이 아니다. 2005년, 대지진을 촬영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과 같이 파키스탄에 간 적이 있다. 현지 도착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10여명의 기자들이 다 사라지고 집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마음에 나가보니 모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당에 서 있었다. 1명이 다가와 신기한 듯 건네는 첫마디. “어떻게 안 깨고 계속 잘 수가 있죠?” 볼펜 기자였던 다른 취재진은 도착 당일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다 꿀잠을 잤지만, 나는 파괴된 도로 상황 등을 촬영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피로에 곯아떨어져, 사람들이 자다 말고 도망 나갈 정도의 강력한 지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로 사용한 집이 버텨 주었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밀렵꾼에게 어미를 잃은 야생동물 보호소에서 촬영 중인 고 김광일 피디. 박환성 피디 페이스북 갈무리

그러나 행운이 언제나 미소 지을 리는 없고, 안타깝게도 재해와 마주친 동료들 역시 너무나 많다. 한 동료는 히말라야 촬영을 갔다가 조난을 당해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고, 또 다른 동료는 고릴라에게 공격당해 오른팔을 절단할 뻔한 지경까지 갔었다. 이 둘은 어찌 됐건 살아 돌아왔기에, 우여곡절 끝에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촬영 중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고 박환성, 김광일 피디는 산재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독립 피디들은 왜 여태까지 산재 적용이 안 되고 있을까. 프리랜서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신료를 징수하는 한국방송(KBS)이 수신료를 이용해 사내 프리랜서들에게 예술인 산재보험을 들어주고, 외주 제작사에도 예술인 산재보험을 들어줄 수 있는 추가 비용을 보태주면 된다. 다큐멘터리의 경우라면 편당 20만원 정도의 돈으로 피디뿐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의 산재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쉽게 보편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한국방송은 ‘외주제작 인력 문제는 외주 제작사의 책임’이고, ‘내부의 프리랜서들은 업무를 위탁받아 독립적인 사업을 영위하는 자(프리랜서의 법률적 정의)들이니 산재보험에 가입할 의무가 없다’고 대답해 왔다. 예술인 산재보험 의무화 논의는 ‘암 덩어리 규제’라고 대답하니,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마저 내팽개치는 집단이 과연 수신료를 징수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동료들 중 누군가가 똑같은 위험을 마주하고 있다. 분쟁이나 재난지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누군가는 밤샘 촬영을 하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운전대를 잡고 있다. 예술인 산재보험도 없이.

※노회찬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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