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민의 더 테크웨이브] 뿔난 마크롱 "정부가 다 해줄게"… '프렌치 AI' 시동 건 까닭

황순민 기자(smhwang@mk.co.kr) 2024. 6. 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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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AI' 혁신 세가지 비결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바테크 2024'에 프랑스 정부가 마련한 스타트업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모여 있다. 파리 황순민 기자

# 지난해 6월 14일 프랑스 파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 최대 규모 스타트업·테크 전시회인 비바테크에 등장해 "프랑스와 유럽연합(EU)은 인공지능(AI) 선도 국가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영국에도 뒤처지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당시 '대통령과의 대화' 세션을 주재한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는 혁신 측면에서 너무 뒤처져 있고 너무 느리게 대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작년 현장에서는 "빅테크에 맞설 만한 제대로 된 기술기업이 프랑스에 없다"는 한탄이 흘러나왔다.

# 올해 5월 21일. 마크롱 대통령은 비바테크 개막 하루 전날 엘리제궁에 비바테크 핵심 연사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는 로빈 리 바이두 창업자,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 얀 르쾽 메타 AI최고과학자 등을 비롯해 프랑스 AI업계 핵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는 AI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재무·산업·디지털주권 장관은 "AI는 유럽이 지난 수십 년간 잃어온 경쟁력을 되찾을 특별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AI 패권을 두고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미국 빅테크가 AI 개발을 주도하자 그 외 국가들은 'AI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AI는 경제·사회·교육·문화·안보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면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국가 대항전으로 비화한 AI 경쟁을 빗대 'AI 국가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했다.

기자가 3년 연속 참가한 비바테크 올해 행사인 '비바테크 2024'에서는 'AI 주권'이 유럽의 가장 큰 관심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AI 경쟁에서 뒤처졌다(lag behind)"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바뀐 분위기가 감지됐다. 챗GPT 쇼크 이후 프랑스 테크업계를 뒤흔들었던 열패감은 "AI 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뒤바뀐 듯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비바테크'대통령과의 대화' 세션에 참석한 이후 관람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비바테크

지난 1년간 프랑스는 유럽의 오픈AI로 불리는 '미스트랄AI', 신성 유니콘 'H' 등 세계적 수준의 AI 스타트업을 배출했다. 구글 딥마인드 출신 인사가 작년 5월 창업한 미스트랄은 시작부터 유럽의 'AI 독립'을 추구한 회사다. 미스트랄은 남프랑스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바람을 의미한다. 미국 빅테크가 장악하고 있는 AI 시장에 프랑스의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뜻이 담겼다. 미스트랄은 기업가치가 60억달러에 달한다는 평가받은 가운데 최근 6억달러 규모 신규 투자 유치를 추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등과도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AI 스타트업 H는 최근 현지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H는 미스트랄AI의 시드 투자금 당시 기업가치(2억6000만달러)를 상회하며 등장과 동시에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빅테크의 프랑스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존은 지난달 초 12억유로를 투입해 파리 지역에 새로운 클라우드 컴퓨팅 역량을 구축한다고 발표했다. MS는 지난달 프랑스에 40억유로를 투자해 데이터센터를 짓고 인프라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마존·구글 등 빅테크는 올해 비바테크에서 대규모 부스를 꾸려 프랑스 스타트업 지원에 나섰다. 유럽 내 미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와 견제론을 의식한 행보로 풀이된다.

프랑스가 단기간에 AI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수학·철학 등 기초학문이 탄탄한 교육체계 △오픈AI·구글 등 빅테크 출신 고급 인력들의 귀환 △억만장자와 정부의 지원으로 탄탄하게 구축된 창업 생태계 △마크롱 정권의 강력한 AI 이니셔티브와 비바테크 플랫폼의 역할 등을 비결로 꼽았다. 올해 엘리제궁 'AI 행사'에 참석한 올리비에 뒤센 아드리엘 공동창업자는 "이론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교육체제 덕분에 얀 르쾽과 같은 우수한 AI 인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게 프랑스의 강점"이라고 전했다.

우수 인력들이 프랑스로 돌아와 AI 기업 창업에 나서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미스트랄AI는 구글 딥마인드와 메타 연구원 출신이 공동 설립했다. H의 창업팀은 미국 스탠퍼드대와 구글 딥마인드 등에서 일한 AI 과학자들로 구성됐다. 이 밖에도 최근 프랑스에서는 제2의 미스트랄을 꿈꾸며 파리로 돌아와 창업에 나서는 고급 두뇌들이 상당수라는 전언이다. 프랑스 출신 얀 르쾽 AI최고과학자는 올해 비바테크에서 "유럽의 학계 시스템은 미국 최고 대학과 비교해서 과학자들의 급여가 매우 낮은 것이 문제였다"면서 "최근에는 유럽 과학자들이 AI 창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활기찬 생태계를 조성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했다.

비바테크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비바테크는 프랑스가 테크와 혁신의 중심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로 만들어진 행사다. 마크롱 대통령이 거의 매년 참석하는 등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모리스 레비 퍼블리시스그룹 회장은 매일경제와 만나 "프랑스가 가속을 시작했다"면서 "인터넷 전환기에는 프랑스가 뒤처졌지만 AI 혁신에서는 빅테크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비바테크는 올해 AI 분야 석학들과 주요 정보기술(IT) 기업 수뇌부·창업자를 대거 초청했다.

탄탄한 창업 생태계도 혁신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프랑스 정부는 '정부가 지원은 하되 주도하지 않는다'는 이념 아래 스타트업 생태계를 육성해왔다. 정부 차원에서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글로벌 인재 유치다.

프랑스 정부는 스타트업 창업자와 근로자, 투자자들이 가족과 4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비자 제도인 '프렌치테크 비자'를 도입했다. 프랑스가 창업 생태계 육성에 있어 '디지털 주권'을 강조해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AI 주권'과 일맥상통한다. 파리 현지에서 만난 여러 정부 관계자와 기업가들이 스타트업 육성 목적에 대해 한목소리로 강조한 것 역시 주권이었다. 구글과 아마존, 넷플릭스 등 미국의 대형 IT 기업이 프랑스와 유럽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 향후 국제 무대에서 기술 발언권을 갖기 위해서는 프랑스만의 스타트업 발전이 필수라는 시각이 그 배경이다. 이는 급속한 성장을 추구한 후 기업공개(IPO)나 매각 등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 활동에 초점을 둔 미국 실리콘밸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프랑스를 미국, 중국에 버금가는 AI 강국으로 평가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모바일 혁신기 기회를 놓쳤던 이 나라는 '산학연'이 똘똘 뭉쳐 국가 차원의 AI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학계의 인재와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결하는 혁신 엔진이 켜진 점은 긍정적이다. 'AI 레이스(race)'에서 추격자 입장인 한국과 프랑스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프랑스의 행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황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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