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 아는 호수 효과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6. 9. 16: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이소연 시인의 ‘테이블’
호수 앞 던져지는 선언과 독백
무엇이든 발설해도 좋은 곳
다 털어내고 얻은 힘과 용기

테이블

이 호수는 허구한 날 나를 불러 자기 앞에 앉힌다

"왜 자꾸 불러내"
가장자리로 떠밀려 온 것들은 모두
호숫가 벤치처럼 앉아 있다
마음 한 귀퉁이 털어내고 싶어서
물결 진 얼굴을 하고 땅콩 껍질을 바스러트린다
맥주를 따르면서

이 호수는 일어설 수가 없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내뱉는 말들마다 잉어 지느러미를 달아
수면 아래로 지나가게 한다
"얜 늙지도 않나 봐"
이 호수는 나이 든 남자의 불거진 뼈를 보여줄 때가 있다
환풍구가 없는데
고인 냄새가 자꾸만 사라졌다

두근거린다와 두려워하다가 서로 다른 온도에서 변질되듯이
이 호수 앞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아주 다르게 듣는다

환기가 안 되는 곳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건
너무 오래되어서 새것 같은 단어 몇개뿐일 거야

내가 만난 호수는 모든 말이 선명하게
흐려져서 좋다
후회하는 싸움들도 좋다

나는 오로지 팔꿈치를 적시려고

당신을 불러다 시를 쓴다

이소연
·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데뷔
· 시집 「콜리플라워」 등 다수
· 동인 '켬' 활동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2020.

호수는 인간의 상처에 대답하지 않는다.[사진=펙셀]

호수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당신은 매번 호수를 오해하고 오독한다. 오늘도 당신은 당신의 감정에 따라 호수로부터 수만 가지 얼굴을 꺼내고 수만 가지 감정을 이해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그 증상이 더욱 심하다. 호수에 주체성을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만들며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이입해 호수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시인들은 그렇게 대상이 가진 현실적 인과관계나 객관적 자리를 부정하고 표층적 의미로부터 자꾸 벗어나 새로운 '지금-여기'를 획득하게 만든다. 이것이 시인들만의 타자화 방식인데 잘된 시에서는 절대 인위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소연 시인의 '테이블'은 그런 타자화 방식이 자연스럽게 감각적으로 이뤄진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호수'는 단순한 사물로서의 호수가 아니다. 주체의 자리에 놓여있기에 '허구한 날' 화자인 "나를 불러 자기 앞에" 앉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인간에게서 위로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말은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고 본질과 다른 가면을 쓰고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번져나가기 때문이다.

화자도 그런 말의 속성을 알기에 호수에 나와 호수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호수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화가 나도 일어서지 않으며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모든 말이 선명하게" 흐려지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어떤 선언도, 어떤 독백도 호수에 하면 아주 뚜렷해지지만 호수는 그 선언이나 독백을 간직할 뿐 퍼트리지 않는다. "내뱉는 말들마다 잉어 지느러미를 달아/수면 아래로 지나가게" 하고 거기에서 아주 살게 만든다. 그러니 "가장자리로 떠밀려 온 것들"의 독백도, "후회하는 싸움들도" 호수에서 발설하면 좋은 것이다.

[사진=펙셀]

그렇다면 그 많은 포화상태의 말들을 호수는 어떻게 관리할까. 가끔 "호수는 나이 든 남자의 불거진 뼈를 보여줄 때가 있다". '불거진 뼈'는 아마도 말의 무덤이거나 말의 화석일 거다. 호수에 와서 고백한 자들도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남은 말들은 스스로 퇴화돼 '불거진 뼈'로 남는다.

"환풍구가 없는데/고인 냄새가 자꾸만" 사라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런데도 "환기가 안 되는 곳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건/너무 오래되어서 새것 같은 단어 몇 개뿐"이라고 화자가 직관적으로 언술한다. 오래돼도 새것처럼 다가오는 말들이란 수천 번을 들어도 듣고 싶은 말들이거나 너무나 아파서 들을 때마다 선명하게 각인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말들의 정체는 누가 알아볼까. 호수에 당도해 거울 같은 수면에 자신의 속마음을 독백으로 풀어낸 자기 자신이다.

당신들도 "마음 한 귀퉁이 털어내고" 싶은 날엔 호수에 갈 거다. 호수는 커다란 귀가 돼 마음을 다 들어주고도 함구할 거다. 수많은 마음이 헤엄쳐 다니는 호수가 당신의 안과 밖에 하나쯤 있다면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길 거다.
다 토해내면 당신들은 홀가분해지거나 정체성이 분명해져서 뒤돌아설 수 있을 거다. 이것을 당신만 아는 '호수 효과'라고 하자.

이소연도 '호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호수 앞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아주 다르게" 들으며, 시를 쓰는 손목과 연결된 "팔꿈치를 적시려고" '당신'이라는 호수를 만나고 있다. 최근에 그녀는 세 번째 시집 「콜리플라워(창비·2024)」를 발간했다. '호수 효과'가 어떤 양상으로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한 분들은 그의 첫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와 함께 세번째 시집을 읽어보면 될 것이다. 호수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인의 입과 귀와 생각과 마음을 상상하면서….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