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코피 한두방울 흘릴 각오는 해야 [아침햇발]

길윤형 기자 2024. 6.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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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의 장녀 이고운(65)씨가 소송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와 함께 3월 25일 오전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일본제철 본사로 들어가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길윤형 | 논설위원

지난달 24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개막식 행사에 참석했다. 한·일 시민사회가 일본을 상대로 전후보상운동을 시작한 것은 한국이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해 낸 직후인 1990년 초부터였다. 옛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이 긴 싸움이 시작된 것도 벌써 30여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강철 같은 의지로 투쟁을 이어온 이들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순 없었다. 피해자 대부분이 숨을 거둬 이날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막내 세대’인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이자순(92)·김정주(92)·김계순(94) 세 할머니가 전부였다. 이춘식(100) 할아버지와 양금덕(95) 할머니는 외부 거동이 힘들어, 2세들이 자리를 지켰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60~70대에 이른 일본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석자들은 20~30년 전 사진 속에 등장하는 젊은 시절의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웃었다.

지난 4일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준비한 ‘일제 강제동원 연구와 활동 20년: 보고와 평가, 그리고 전망’이란 이름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행사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행사를 보며, 한·일 시민들이 눈물과 땀으로 이어온 전후보상운동이 이제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운동의 성과를 차분히 정리해 후세에 전하는 것은 남은 세대의 몫일 것이다.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1990년부터 일본에서 제기한 피해보상 소송은 총 10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본제철 등 3건의 소송에선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화해했지만, 다른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이 한국 법정으로 자리를 옮겨 2018년 10월 기적 같은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판결 이후 한·일은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것 같은 처절한 갈등을 벌였다. 이후 등장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제3자 변제안’을 뼈대로 하는 파격적이며 굴욕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일본이 이에 대해 지금껏 내놓은 ‘호응 조처’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도 안 되는 2억엔(약 17억6000만원)을 배상과 관계없는 교류 사업에 출연하겠다고 밝힌 게 전부다. 일본 피고 기업들은 지난 3월 말 피해자들의 자녀들이 본사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는데도 만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두루 살펴볼 때 일본의 ‘전향적 대응’을 끌어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게 아니냐고 결론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일 시민들이 이뤄낸 이 엄청난 성과를 지금처럼 계속 골방에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정부의 3자 변제안을 비판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마땅히 위자료를 받아야 하는 원고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 2018년 10~11월 판결이 확정된 15명의 피해자 가운데 11명이 돈을 받았다. 심규선 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이후 추가 승소 판결을 받은 52명 가운데 90% 이상이 이 안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 돈이 지급되도록 정부와 1965년 한-일 협정 수혜 기업들이 뜻을 모으고, 필요하다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특별법 제정도 고려해야 한다.

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이들은 피고인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를 진행하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 사건(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은 2022년 5월, 이춘식 할아버지 사건(일본제철의 피엔알 주식)은 2023년 1월부터 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도 고민이 많겠지만, 이제 그만 결단해야 한다. 일본이 높게 평가하는 윤 대통령 재임 중에 현금화가 이뤄져야 그나마 외교적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정권이 바뀐 뒤 결정이 나오면, 2018~2019년에 맞먹는 ‘제2의 한일전’이 터지게 될지 모른다.

일본에게도 당부한다. 현금화가 끝나면, 한-일 간 역사 문제는 두 나라가 해법을 찾아내야 하는 ‘외교 현안’이 아닌 ‘기억과 교육의 문제’가 된다. 윤 대통령은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피가 철철 흐르는 내상을 감수했는데, 일본도 코피 한두방울쯤 흘릴 각오는 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고령인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단 한마디라도 ‘미안했다’고 말해달라.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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