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예산을 기억하라 [윤지로의 인류세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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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만석꾼이었다.
'나는 지금껏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갑자기 줄이긴 어렵다. 그러니 배출량에 비례해 탄소예산을 달라'는 주장이다.
한국 기후소송의 청구인측 자료에 따르면 인구비례를 적용하면 2020년 이후 우리에게 남은 탄소 예산은 33억4000만t이고, 그사이 쓴 걸 감안하면 내년에 바닥나게 생겼다.
그 중엔 탄소예산이 이미 바닥났다는 것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숨만 쉬고 살 수는 없으니 이런 건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36개 시나리오를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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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할아버지는 만석꾼이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곳간엔 곡식이 가득했고, 그 덕에 자손들은 배고픔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정신없이 곡식을 꺼내 먹다 보니 곳간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흥청망청 쓰다간 몇 년 뒤부터 손가락만 빨고 살아야 할 판이다. 이제 식구들의 생존을 걸고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남은 곡식을 집안별로 나누자. 소비의 상한을 분명히 정하면 계획성 있게 아껴 먹을 것이다. 형제간 횡적 배분도 중요하지만 세대간 종적 배분도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아이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나누지?’
지난 4월과 5월 두 차례 진행된 헌법재판소 ‘기후소송’ 공개변론에서는 탄소 예산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앞으로 우리가 배출할 수 있는 탄소의 양, 즉 곳간 재고가 탄소예산이다. 할아버지의 곳간이 아무리 크다한들 보관용량에 물리적 한계가 있는 것처럼 지구 온도상승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한 탄소예산도 과학적으로 정해져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20년부터 남은 전 세계 탄소예산이 5000억톤이라고 말한다.
총량은 과학이 정하지만, 배분은 철학의 몫이다. 온실가스 배출은 그 나라의 권리인가 책임인가, 역사적 책임까지 묻는 게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가치판단이 담길 수밖에 없다. 환경분야는 기본적으로 ‘오염자 부담 원칙’을 따른다. 더럽힌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다. 탄소예산에 적용한다면, 누적 배출량이 많은 나라에 탄소예산을 적게 배분하면 된다. 가장 상식적이며 공정한 방법이다.
정반대도 가능하다. ‘나는 지금껏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갑자기 줄이긴 어렵다. 그러니 배출량에 비례해 탄소예산을 달라’는 주장이다. 지금껏 지구를 더럽힌 것도 모자라 앞으로 더럽힐 권리까지 인정해달라니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이 쓰인다. 배출권거래제에서 각 기업에 배출권을 나눠줄 때 쓰는 ‘그랜드파더링’이 이런 식이다. 배출을 일종의 ‘권리’로 보는, 기득권에 유리한 방식이다.
인구 비례로 나눌 수도 있다. 우리 일상에서도 많이 쓰는 ‘엔(n)분의 1’ 방식이다. 누구는 득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기계적 형평성은 맞출 수 있다. 독일 기후소송에서 이 방법이 활용됐다. 한국 기후소송의 청구인측 자료에 따르면 인구비례를 적용하면 2020년 이후 우리에게 남은 탄소 예산은 33억4000만t이고, 그사이 쓴 걸 감안하면 내년에 바닥나게 생겼다. 정부측은 다양한 변수에 좌우되는 탄소예산을 근거로 정부 정책을 문제 삼는 건 부적절하다고 반박한다.
탄소 예산 배분에 정해진 공식은 없지만 최대한 정의로운 답을 찾을 수는 있다. 유럽 기후변화 과학자문위원회는 지난해 6월 2030~2050 유럽연합(EU)탄소예산을 110억~140억t으로 유지하라고 권고했다. 이 과정에서 검토한 시나리오가 1000개가 넘는다. 그 중엔 탄소예산이 이미 바닥났다는 것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숨만 쉬고 살 수는 없으니 이런 건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36개 시나리오를 추렸다. 파리협정 목표를 준수하는 선에서 각국 인구와 역사적 책임, 감축 능력 등 형평성, 윤리, 현실성을 반영했다.
온실가스 감축 선도국이 되겠다면서 ‘산업구조상 급격한 감축은 어렵다’고 운운하는 건 기만이다.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2050 탄소중립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하는 건 가식이다. 탄소예산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미래 세대를 위해’라는 추상적인 말에 실체를 부여한다. ‘국가별 탄소예산은 의미 없다’는 주장은 과학적 이해도, 철학적 고민도 없다는 부끄러운 자기 고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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