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년 전 용산 대통령실 일대 그린 강세황 화첩 발굴
“교외에 산 지 이미 오래지만/ 서울에 그리움이 오히려 남았다/ 남산과 삼각산/ 때로 집 뒤에 올라서 본다.”(강세황, <두운지정 화첩> 중 ‘옥후북조도’에 실린 주제시, 1784년)
“뜰에는 여러 풀이 줄지어 있고 밖에는 밤나무 숲이 있으니, 때로 들꽃을 따고 덜 익은 밤을 까면서 참으로 긴 날을 쓰고 남은 해를 보낼 수 있다.”(강세황, <표암유고> 중 ‘두운지정기’, 1784년 추정)
1784년 3월 당대 최고의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은 서울 교외 둔지산(둔지미) 별서 ‘두운지정’(逗雲池亭)에 머물렀다. 아마도 그의 짧은 백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는 1783년 한성부 판윤(서울시장)을 맡았고, 1784년 동지사(12월 떠나는 정기 사절단)에서 부사(부사절단장)를 맡았다가 1785년 다시 한성부 판윤을 맡았다.
두운지정에서 그린 진경산수화
강세황은 아마도 1784년 3~12월 사이, 한성부 판윤을 그만두고 동지사 부사를 맡기 전 공백기에 둔지산의 별서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한성부 판윤 시절엔 둔지산 별서에서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때 둔지산(용산기지 남쪽) 지역에서 서울 육조거리(광화문 앞)에 있던 한성부에 출퇴근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세황의 본가는 서울 남부 회현방(현재 회현동)에 있었는데, 한성부 판윤 시절엔 이 집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둔지산 별서에 머물던 시절 이 일대에 대한 기록물과 같은 그림을 남겼다. 바로 <두운지정 화첩>인데, 모두 16점의 부채용 그림으로 이뤄져 있다. 이 화첩은 2010년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가 번역된 뒤 글로만 알려졌는데, 이번에 16점의 그림 가운데 8점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또 기존에 낱장으로 공개된 3점의 그림도 바로 이 화첩에 포함됐던 것으로 이번에 확인됐다. 이렇게 이 화첩의 16점 가운데 11점이 확인됐고, 나머지 5점은 사라진 상태다.
이 <두운지정 화첩>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 그림들이 다룬 지역 때문이다. 이 화첩에 남아 있는 11점의 작품은 5점의 진경(실경) 산수화, 4점의 정물화, 2점의 남종 문인화(중국풍 문인화)다. 그런데 5점의 실경 산수화가 다룬 지역은 바로 현재의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있는 용산기지(용산공원) 일대다. 강세황이 글에서 ‘둔지산’, 그림에서 ‘두운지정’이라고 말한 바로 그 지역이다.
현재 대통령실이 있는 곳은 용산기지, 용산공원인데, 둔지산, 두운지정은 어찌 된 일일까? ‘용산기지’와 ‘용산공원’은 왜곡된 지명이다. 과거 용산기지 일대의 자연 지명은 ‘둔지미’(둔지산)였고, 행정 지명으로도 ‘둔지방’이었다. 용산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왜 현재는 ‘용산기지’가 된 것일까? 1904~1906년 일제가 둔지산 지역의 땅 115만 평을 군용지로 강제 수용하면서 ‘용산’이란 이름을 멋대로 갖다 붙였다. 진짜 ‘용산’은 둔지산에서 서쪽으로 3㎞ 정도 떨어진 마포대교 북쪽의 청암동 언덕이다. ‘용산기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된 이름이다.
벼슬 마치고 붓 끝에 품은 그리움
<두운지정 화첩>에서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옥후북조도’(집 뒤에서 북쪽을 바라보다)다. 이 그림은 이 화첩과 별도로 1995년 낱장으로 공개됐고, 제목도 ‘남산과 삼각산’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다 2010년 <표암유고>에서 화첩 관련 기록이 확인되면서 원제목이 ‘옥후북조도’임을 알게 됐다. 이 그림에 실린 주제시는 이 글의 맨 앞에 있다. 한성부 판윤을 마치고 도성 밖으로 이주한 뒤 서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이 그림은 18세기 말 용산기지 일대와 서울 도성을 둘러싼 산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의 아래쪽 마을은 강세황의 두운지정이 있던 둔지산 일대 ‘정자동’으로 보인다. 그림 제목의 ‘옥후’(집 뒤)라는 표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정자동은 강세황의 두운지정이 들어선 뒤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한성부 판윤을 지낸 강세황이 도성 밖 둔지산 지역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자동에 다른 기와집이 있는 것을 보면, 지위나 재산이 있는 다른 사람들도 살았을 것이다.
마을 뒤 오른쪽으로는 남산의 두 봉우리가 보이고 남산 왼쪽으로는 북한산 보현봉이 보이며, 보현봉 앞엔 북악(백악), 그 왼쪽엔 인왕산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의 풍경은 현재도 국립중앙박물관 뒤쪽에서 볼 수 있다. 현대 건물에 가려진 부분은 빼고 말이다. 현재 사진에서 남산 아래의 오른쪽 언덕이 이 지역의 지명이 나온 둔지산이다. 18세기 중반 겸재 정선이 그린 `서빙고 망 도성도’도 같은 구도의 풍경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번에 새로 공개된 용산기지 일대의 그림 4점 가운데 첫째 그림은 ‘두운정 전도’다. 강세황은 현재의 용산기지에 있던 자신의 별서를 ‘두운지정’(구름이 머무는 연못 정자) 또는 ‘두운정’(구름이 머무는 정자)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모두 둔지미(둔지산)라는 고유 지명을 한자로 비튼 것이다. 고유 지명인 둔지미는 낮은 산이나 언덕을 말하는데, 전국에서 널리 사용된 지명이다.
이 그림을 보면, 강세황의 별서는 ㅂ자 모양의 집이었다. 앞쪽은 사랑채, 뒤쪽은 안채이며, 집 뒤쪽엔 황토 언덕이 있었다. 특히 사랑채의 왼편엔 각각 부채꼴과 팔각형 창문이 달린 누각, 화선루가 있다. 강세황은 이곳에서 지내며 주변 풍경을 그렸다. 이 그림의 주제시는 “교외의 수십 칸 집/ 분수에는 사치스럽지만/ 묘교(청나라 사람 정태)와도 승경을 비교하지 못하고/ (왕유의) 망천 별장과도 감히 견줄 수 없다”라고 돼 있다. 내게는 분에 넘치지만, 옛사람의 별장과 비교하면 소박하다는 뜻이다.
둘째 그림은 ‘화선루 전면도’로 두운지정 화선루의 부채꼴 창을 통해 본 한강과 관악의 모습이다. 바로 앞에 나무들이 서 있고, 가운데 한강이 흐르며, 한강 위로 현충원 자리가 보이고, 멀리 관악이 우뚝하다. 이 그림의 주제시는 “높은 누각에서 혼자 누웠다 일어났다/ 아침 내내 관악을 마주한다/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따로 즐길 것이 없다”고 돼 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이 같은 해인 1784년 윤삼월에 그린 ‘서빙고 망 관악’(서빙고에서 관악을 바라보다)이나 앞서 1740년대에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이란 작품과 구도가 비슷하다. ‘화선루 전면도’는 한강에서 떨어진 두운지정에서 그렸고, ‘서빙고 망 관악’과 ‘동작진’은 한강 가에서 그렸다.
셋째 그림은 ‘화선루 측면도’인데, 화선루의 동북쪽에서 남동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화선루 전면도’와 비슷한 구도인데, 관악의 동쪽이 더 멀리까지 포함돼 있고, 화선루의 모습도 그림에 들어 있다. 화선루 안의 사람은 당연히 강세황 자신일 것이다. 이 그림의 주제시는 “늙어서 교외 별장에 누워 병든 몸을 돌보니/ 높은 누각에서 아득히 동호(동작진 부근 한강)가 보인다/ 푸른 물결이 천 그루 버드나무를 두르고 있으니/ ‘강남춘의도’가 완연하다”라고 돼 있다.
넷째 그림은 ‘화선루 서면도’인데, 두운지정에서 본 서쪽의 모습을 그렸다. 서쪽 마당엔 포도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집 밖으로 밤나무가 숲을 이뤘다. 멀리는 한강과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 있고, 집 서쪽과 북쪽으로는 황토 언덕이다. 이 그림의 주제시는 “누각 서쪽엔 어떤 곳이 있는가/ 회칠한 담장과 포도 넝쿨 기둥/ 때로 지팡이 짚고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밤나무 숲 아래를 거닐기도 한다”고 돼 있다. <표암유고>엔 이 화첩에 ‘화선루 동면도’도 있다고 나오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이 밖에 이 화첩엔 8점의 정물화가 있었는데, 현재 4점이 남았다. ‘작약도’, ‘죽도’(대나무), ‘월계도’(월계화), ‘태호석도’(중국산 정원 장식돌) 등이다. ‘난초도’, ‘홍매화도’, ‘도화도’(복숭아꽃), ‘지두소작도’(가지 끝 참새) 등 4점은 사라졌다. 또 남종 산수화 2점도 포함돼 있었는데, 현재는 화첩에서 빠져 각각 다른 곳에 소장돼 있다. ‘임거추경도’(숲속 집 가을 풍경)와 ‘산정송석유인왕래도’(산속 정자와 소나무와 돌, 노는 사람들이 오가다)다. 남종화는 사대부가 그린 중국풍 산수화로 전문 화가가 그린 북종화와 구분되는데, 대체로 틀에 박힌 그림이다. 현재 이 화첩엔 원래 화첩에 포함되지 않았던 강세황의 ‘니금죽도’(금빛 대나무) 1점과 아들 강인이 그린 ‘총석정도’ 1점이 추가로 붙여져 있다.
“정선에서 나아가 살아가는 공간 그려”
이 화첩에 대해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최근 ‘표암 강세황의 <두운지정 화첩>-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 신자료 발굴’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강세황은 자신의 살림터에서 주변 풍경과 정원의 꽃을 그렸다. 과거의 진경 산수화가 금강산과 같은 명승지를 그렸다면, 강세황은 살아가는 공간을 그렸다. 이것은 정선에서 시작된 진경 산수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두운지정 화첩>은 화첩 자체와 화첩에 대한 화가의 글, 화가가 쓴 그림 속 주제시까지 모두 갖췄다. 강세황은 <표암유고>에서 이렇게 썼다. “1784년 3월 교외 둔지산의 정자에 나가 머물렀다. 하루 내내 일이 없다가 우연히 16개의 부채를 얻어 정자와 동산의 경치 및 꽃과 풀, 새와 벌레를 되는대로 그리고, 그 위에 각각 주제시를 썼다.”
이 화첩을 공개한 마이아트옥션의 전남언 학예연구실장은 “우리 회화 역사에서 사대부의 문집에 소개된 작품의 실물이 존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전쟁이나 혼란 속에서 유실된 경우가 많았다. 강세황과 중요한 화가의 화첩이 보존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화첩은 미술사뿐 아니라 지역 역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용산기지는 지난 100년 이상 외국 군대에 점령돼 한국인들에게 금지된 땅이었다. 그러나 이 화첩을 보면, 240년 전 용산기지 안에 둔지산과 정자동이란 큰 마을이 있었고, 거기서 강세황이란 위대한 화가가 살며 그림을 그렸다. 둔지산 일대가 외국군 주둔 이전에 우리의 삶터였다는 점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외국 군대 점령지 옛 모습 남겨
강세황이 살았던 두운지정의 위치에 대해 김 센터장은 “<표암유고>의 ‘두운지정기’에 ‘수백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는데, 두운지정은 바로 그 마을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적혀 있다. 수백 가구 마을은 둔지산 대촌(큰말)을, 서북쪽은 정자동(정잣골)을 말한다.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서북쪽 어린이정원 부근 언덕 아래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대촌이나 정자동은 조선 때 이 지역의 지명이다.
강세황은 18세기에 활동한 조선의 고위 관리이자 화가, 평론가다. 60대에 영조의 배려로 관직을 시작해 한성부 판윤(서울시장)까지 올랐다. 화가로서는 정선에서 시작된 진경 산수화를 발전시켜 조선 최고의 화가인 제자 김홍도에게 전했다. 미술 평론가로서도 당대 최고여서 누구나 그의 평론을 받으려 했다. 그동안 그의 최고 화첩으로는 흔히 <송도기행첩>이 꼽혔으나, 앞으로 <두운지정 화첩>도 그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2024년 5월30일 마이아트옥션의 경매에서 <두운지정 화첩>은 8억5천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전남언 실장은 “가치를 인정받은 가격”이라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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