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견문발검] 학살 위의 무지개, 핑크워싱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4. 6. 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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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 2023년 11월, 한 이스라엘 군인이 가자를 배경으로 무지개 깃발을 펼치고 사진을 찍어 SNS 계정에 게시했다. 사진=이송희일 감독 제공

2023년 11월, 한 이스라엘 군인이 폐허가 된 가자를 배경으로 무지개 깃발을 펼치고 사진을 찍어 SNS 계정에 게시했다. 곧장 파문이 일었다. 그 군인은 커밍아웃한 게이였다. 가자로 진격하는 장갑차에도 무지개 깃발을 꽂고 다녔다. 학살 위의 무지개, 완벽한 핑크워싱(pinkwashing)이었다.

핑크워싱이란 말은 2011년 뉴욕타임즈 칼럼에 처음 등장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 억압을 가리기 위해 성소수자 이슈를 교묘히 이용하는 전략을 일컫는다. 2005년부터 이스라엘은 동성애 마케팅을 펼치며 국가 이미지를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세탁해왔다. 2010년에는 전 세계 LGBT 인사들을 초청하느라 무려 9천만 달러를 지출했다. 또 외곽 조직들을 운영해 팔레스타인이 성소수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을 대량으로 유포하고, 이스라엘을 '중동 인권의 보루'로 자찬하는 정보를 흘려보낸다.

▲ 다윗의 별이 그려진 무지개 깃발을 단 이스라엘 장갑차(APC). 사진=이송희일 감독 제공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는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이 없었다. 단지 1930년대 위임 통치 기간에 영국이 자국의 소도미법을 이식해 동성애를 불법화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오니스트들은 인종청소를 세탁하느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성소수자를 구하자며 잘못된 정보를 지금 이 시간에도 살포한다. 이런 악의적 위선은 정작 팔레스타인 성소수자들의 실제 목소리를 지운다. '집단학살에는 자긍심이 없다'는 구호 아래 팔레스타인 성소수자들과 전 세계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도 감쪽같이 삭제한다.

근자에 들어, 핑크워싱 개념이 보다 확장됐다. 국가와 기업이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성소수자 친화적 이미지를 도구화하는 모든 전략을 지칭한다. 2019년 세르비아에서 최초의 레즈비언 총리가 탄생해 화제가 됐는데, 이것 역시 핑크워싱으로 비판받았다. 집권 우익 세력이 민주주의를 퇴행시킨다는 비판을 받자 레즈비언을 명목상 총리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스페인에서도 핑크워싱 논쟁이 한창이다. 2026년 발렌시아에서 개최되는 게이 올림픽에 극우 세력이 끼어들면서 심각한 내홍을 겪는 중이다. 지난달에는 유럽 최대 문화 행사이자 성소수자 친화적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보이콧하느라 스웨덴 말뫼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 참가자를 용인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표현을 금지했다는 게 이유였다. 2024년 2월에는 미국 최대 성소수자 옹호 단체인 인권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이 무기 제조업체 노스롭 그루먼(Northrop Grumman)과 후원 관계를 맺고 있는 위선이 폭로되며 반대 시위에 직면해야 했다.

문제적인 영리 행위로 비판받는 기업들이 이미지를 세탁하느라 성소수자 행사를 후원하는 경우도 갈수록 비판이 가해지는 형국이다. 화석연료 기업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2017년 워싱턴 DC 퀴어 퍼레이드의 차량 행렬이 농성자들에 의해 처음 점거됐다. 뒤이어 2023년 영국의 '성소수자 어워드'는 화석연료 기업 후원 때문에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슬그머니 후원 관계를 정리했다. 같은 해 런던 퀴어 퍼레이드도 보이콧 시위로 행진이 중단됐다. 코카콜라와 유나이티드 항공 등 오염 기업들의 후원을 받은 까닭이다.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이런 반발은 더욱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6월1일 개최되는 퀴어 퍼레이드를 경유하며 핑크워싱 논란이 벌어졌다. 가자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미국, 영국, 독일의 대사관 퍼레이드 참여, 그리고 특허권 독점으로 의약품접근권을 침해하는 초국적 제약회사 길리어드와 GSK의 퍼레이드 후원이 문제가 됐다.

오늘날 퀴어 퍼레이드는 양날의 칼을 쥐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극우 물결 속에서 퍼레이드 원산지인 미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에서 퍼레이드가 위협당하는가 하면, 다른 측면에선 그 동안 성소수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구축한 퍼레이드의 성과, 즉 가시화 운동의 성취가 기업과 지배 엘리트, 또는 출세주의자들에게 이용되는 핑크워싱의 위험 속에 놓여져 있다. 심지어 우익의 위협 때문에 기업과 지배 세력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적대적 공존이 발생하기도 한다.

▲ 6월1일 오후 무지개 깃발을 든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서울 종로구 종각역을 출발해 종로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떻게 무지개 깃발을 지킬 수 있을까? 그중 하나는 퍼레이드가 출발한 시초의 풍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식민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저항 주체들과 연대하고 그것으로부터 확장의 힘을 얻고 보편의 평등을 일구려던 급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시원의 풍경 말이다. 애초의 무지개 의미 말이다.

“모두가 자유롭지 않으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이 슬로건은 팔레스타인 연대 구호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퍼레이드가 탄생한 스톤월 봉기의 구호이기도 하다. 곤궁에 처한 이웃들의 사정을 두루 살피며 연대하는 것, 거기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이웃을 살피지 않으면 끝내 자신도 살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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