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적 스토리텔러’ 임윤찬, 순도 100% 예술의 경지 [고승희의 리와인드]
7일 롯데콘서트홀 시작으로 6개 도시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전람회의 그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전람회 안으로 들어선 그의 걸음은 빨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에 당도한 설렘과 경쾌함은 아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곳에서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트르만의 첫 그림 ‘난쟁이’로 향하는 길이었다. 임윤찬은 굳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기 위해 본색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지극히 순수하고 찬란한 ‘예술의 경지’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의 리사이틀이 지난 7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시작됐다. 전국 6개 도시, 7개 공연장(9일 충남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 12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15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17일 경기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19일 광주예술의전당 대극장, 2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이어지는 일정의 첫날이었다.
임윤찬은 이번 리사이틀에서 멘델스존의 ‘무언가’와 차이콥스키의 ‘사계’,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당초 이 공연에서 임윤찬은 최근 발매한 음반에 담긴 쇼팽의 연습곡 27곡을 들려줄 예정이었으나, 지난 4월 ‘전람회의 그림’으로 프로그램을 변경했다. 수백, 수천 번 갈고 닦았을 음반 녹음곡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의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임윤찬이 정식 공연에서 처음으로 연주한 ‘전람회의 그림’은 이번 리사이틀의 백미였다. 모든 연주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가였지만, 이번에도 그는 롯데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2000여명의 관객을 놀라게 했고 숨죽이게 했다.
이 곡은 무소륵스키와 깊은 관계를 맺어온 친구인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에 걸린 그림들을 음표로 옮긴 곡이다. 어떤 예술도 기존 작품을 다른 분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나 평론가도 한 사람의 그림을 음악으로, 음악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음악은 추상의 세계이기에 사실적인 그림을 옮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졌다. ‘전람회의 그림’이 특별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무소륵스키가 악보로 옮긴 이 그림 중 상당수는 유실된 상태로 음악을 통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추정은 각양각색으로 남아있다.
클래식 음악사상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인 시도였던 ‘전람회의 그림’은 이날 임윤찬의 손끝에서 또 한 번 ‘불가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무수히 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했지만, 임윤찬의 연주가 달리 다가온 것은 그의 음악 안엔 무소륵스키가 온전히 담겼기 때문이다. 정서적 교감을 쌓은 친구의 죽음 이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무소륵스키의 감정, 어쩌면 이미 수없이 봐왔을 친구의 그림을 마주하는 심상이 그림 하나 하나를 뚫고 음악으로 전해졌다.
전람회를 향한 빠른 걸음은 첫 그림(‘난쟁이’) 앞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제동이 걸린다. 멈추기도 전에 날벼락처럼 등장한 그림. 압도적 화풍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무겁게 내리누른 두 마디, 여섯 개 음표의 여운을 길게 이어가다(점이분 음표의 페르마타) 시작과 동시에 숨을 멈춰버린다. 몸을 웅크린 채 건반 앞으로 다가선 임윤찬은 왼손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불어넣고, 오른손으로 곧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음형을 완성했다.
그러다 다시 평온하게 산책(프롬나드)을 이어갔고, 중세시대의 옛 성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이름 없는 예술가(제2곡 고성)를 피아노로 그려나갔다. 쓸쓸하고 외롭고, 짙고 깊은 밤이었다. 그림 앞을 떠나자 다시 경쾌하고 홀가분한 프롬나드가 이어졌고, 이윽고 ‘튈를리 궁전’(제3곡) 앞에서 멈춰섰다. 변덕스럽게 뛰노는 음들이 사랑스럽다가 이내 묵직하고 무거운 저음 화성으로 ‘소 달구지’(비들로)를 끈다. 어두워진 마음을 안고 다음 그림으로 향하는 산책길의 걸음엔 이전 감상이 여운이 서늘하게 스며들어 무겁기 그지 없다. 아기자기해야할 어린 소녀들의 발레(껍질을 덜 벗은 햇병아리들의 발레’)를 보는 임윤찬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소녀 발레리나들의 가벼운 움직임은 기괴한 박자와 불협화음으로 채워졌다. 누군가 긴 줄을 매달아 움직이는 인형들의 몸짓이었다.
두려울 정도로 격정적인 순간들이 여섯 번째 그림(‘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무엘레)을 마주하며 이어졌다. 멈출 생각없이 달라나가는 빠른 속도의 ‘시장’에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질주가 이어졌다. 전람회의 마지막 그림에 향할수록 음악은 난폭해졌다. 11곡 ‘키예프의 대문’에선 위압적으로 화음을 내리쳤고, 피아노가 박살날 것처럼 찍어눌렀다. 피아노의 본질을 뛰어넘는 엄청난 경험을 일러주는 곡이었다.
‘전람회의 그림’에 앞서 들려준 멘델스존의 무언가 마장조 작품번호 19-1과 라장조 85-4는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음색들이 치유의 시간을 안겨줬다. 차이콥스키의 사계 ‘12곡’은 ‘무언가’에선 멈춤없이 이어지며 하나의 곡처럼 들리게 했다. 달달이 묘사한 이 음악은 따뜻한 ‘난롯가에서’ 시작해, 한겨울의 축제(‘사육제’)를 밝고 경쾌하게 들려주더니 환상적인 ‘백야’(5월)를 신비롭게 노래했다. 격렬하고 역동적인 ‘사냥’(9월), 환상동화 같은 ‘크리스마스’(12월) 왈츠까지 임윤찬이 담기지 않은 곡은 없었다.
1년 6개월 만에 열리는 임윤찬의 국내 리사이틀은 또 한 번 진화하고 진일보한 한 명의 연주자를 마주하는 자리였다. 임윤찬은 타고난 스토리텔러였고,그는 이번에도 증명했다. 임윤찬의 드라마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한 사람의 음악을 깊이 탐구한 뒤 온전히 체화해 빚어낸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음악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해온 그는 이전보다 더 깊이 음악 안으로 파고든 모습이었다. 임윤찬의 음악 안엔 닿을 수 없을 줄 알았던 순수한 예술의 경지가 자리하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순도 100%의 음악, 그 어떤 의도나 목적도 개입하지 않은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마침내 마주하게 됐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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