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품고 파리로 간 화가…단색화폭 뒤엔 ‘시대의 아픔’

노형석 기자 2024. 6. 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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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여름, 프랑스 파리 시내 장 브롤리 갤러리 작업실에서 생전의 윤형근(1928~2007) 작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1980~1981년 프랑스 파리 작업 기간 천으로 된 캔버스를 쓰지 않고 한지에 미묘한 번짐과 농담으로 표현한 소품 작업과 말년기인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마련한 현지 작업실에서 만들어 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통해 두 차례에 걸친 파리 시기 작업을 되살펴 보는 틀거지로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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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파리/윤형근’전
윤형근 작가가 1981년 파리 작업시절 한지 위에 유화로 그린 소품인 ‘암갈색과 암청색(Burnt Umber & Ultramarine)’. 노형석 기자

“아름답다는 건 인간 내면의 이야기야. 진실한 것, 진리를 위해 살고 생명을 거는 거지. 그러니까 가장 아름답게 산다는 건 가장 고생스럽게 살아가면서 살아남는 거야. 나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고…”

2002년 여름, 프랑스 파리 시내 장 브롤리 갤러리 작업실에서 생전의 윤형근(1928~2007) 작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맨살 캔버스에 테이프 선을 정연하게 이리저리 붙여 기둥 모양의 윤곽선을 구획하고 그 위에 빗자루 모양의 붓으로 암청빛 유화안료를 여러번 겹쳐 칠한 뒤 테이프선을 떼어내는 고된 작업을 되풀이 하던 중이었다. 잠시 쉬면서 담배를 피우던 작가는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는 현지 미술인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한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한국 땅에서) 200만명 넘게 죽은 1950년대 살아남았어. 진리를 위해 살다가 그 무서운 고비를 넘은 사람인데… 내 그림 세계는 내가 살아온 고난의 세월이 담긴 이야기를 함축시킨 거야. 엄청난 고행을 하고 사선을 넘은데서 우러나온 것이거든.”

1981년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할 당시 모눈종이 노트에 남긴 회화 드로잉. 노형석 기자

이렇게 22년 전 작가의 육성이 생생하게 울려 나오는 파리 인터뷰 대담 영상을 배경으로 차려진 특별한 전시회가 애호가들을 맞고 있다. 서울 삼청동 피케이엠 갤러리에서 지난달 초부터 열리고 있는 ‘윤형근/파리/윤형근’ 전이다. 한국 단색조회화의 대가인 고인이 생전 파리 공간에서 창작했던 미공개 그림들을 조명하는 자리다. 1980~1981년 프랑스 파리 작업 기간 천으로 된 캔버스를 쓰지 않고 한지에 미묘한 번짐과 농담으로 표현한 소품 작업과 말년기인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마련한 현지 작업실에서 만들어 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통해 두 차례에 걸친 파리 시기 작업을 되살펴 보는 틀거지로 꾸려졌다.

윤형근은 화단에서 화면을 온통 같은 색깔의 색면이나 선으로 뒤덮는 1970~1980년대 단색조회화(모노크롬)의 대가였다. 텅빈 화폭에 시커먼 유화물감으로 칠한 색면들을 마주 보게 하거나 배열해 하늘과 땅, 사람을 화폭 자체의 색면과 틀로 상징하게 하는 천지인 그림은 이제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하는 중요한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림처럼 단순하지 않고 파란만장했다. 1940년대 말 미군정이 강행한 ‘국립 서울대 설립안’(일명 국대안)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제적됐고,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1956년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 재직 당시 정부 권력자가 뒷배를 봐준 부정 입학생 비리를 학교 쪽에 고발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 고문받고 감금되기도 했다. 치안당국에 동향을 신고하고 감시 받는 핍박 속에서 1973년 이후 채색 그림은 사라지고 검은색 면들이 화폭을 채우는 단색조 그림들이 등장해 말년까지 이어졌다. 전시장에는 이런 개인사적 이력을 깔고 1980년 광주학살에 좌절한 그가 그해 12월 파리로 가서 울분을 삭이며 그린 작품들과 2002년 파리 현지 화랑 전시를 위해 다시 갔을 때 그린 작업들을 추려 내걸었다.

생전 윤형근 작가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무엇보다 주목되는 게 80년대 첫 도불 시기 한지 소품들이다. 하늘을 뜻하는 암청색 울트라마린과 땅을 상징하는 암갈색 우버 안료를 섞어 마치 다색 수묵화처럼 오묘한 빛깔이 허연 화면에 보풀처럼 피어오르는 장관을 작은 화면에서 눈으로 음미하게 된다. 80년대까지 그의 삶을 옥죄었던 한반도 근현대사의 질곡이 색조의 선염 효과를 통해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2년 파리 작업들은 ‘천지문’ 회화의 기본 틀과 얼개가 유지되고 있지만, 더욱 큰 캔버스 화면에 더욱 원숙하고 역동적인 필치로 도상을 풀어내는 말년기의 특징이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파리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 지인에게 보낸 엽서, 파리에서 사용한 드로잉북 등 각종 자료도 함께 볼 수 있는데, 81년 모눈종이에 그린 천지인회화의 드로잉 작업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29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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