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재판장님, 잠시만요" 선고 멈춘 피고인 이야기

여현교 기자 2024. 6. 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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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법정에서 드라마나 영화처럼 선고 직전 결과를 바꾸거나 멈출 수 있을까.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에선 전과 4범이라는 이유로 소매치기로 몰린 피고인의 선고 당일, 변호사 역을 맡은 배우 남궁민이 새로운 증거를 들고 나타납니다.

SBS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 中
"재판장님, 새로운 증거물을 신청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증거물입니다"

검사가 막아섰지만 판사를 설득하고, 무죄를 끌어냅니다. 다수의 법정 드라마나 변호인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선 한 번쯤은 이렇게 선고를 제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실제 법정에서는 선고 직전 결과를 뒤집거나 멈추는 것이 이례적입니다. 변론이 종결된 상황에선 추가 증거 등이 고려되지 않고 판결에 영향을 미칠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다시 '변론 재개'가 되어야 합니다. 탄원서 등 참고 서면을 제출할 순 있지만 선고 직전에 이를 막아서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판결문이 다 준비된 상태로 선고하러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법조계 종사자들이 이런 장면들을 '너무 드라마스럽다'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2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312호 법정에서는 판사의 낭독을 기다리던 피고인의 선고가 미뤄졌습니다. 타인으로부터 10억 원을 편취해 특경법상 사기 혐의로 1심에서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2심 선고를 앞둔 피고인이었습니다. 법정에 서서 발끝만 바라보던 피고인에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전말은 이렇습니다.

"사건번호 2023노3XX1 피고인 나오세요" 재판장의 호명 후 포승줄에 묶인 피고인이 법정에 나왔습니다. 피고인의 이름, 주소를 확인하고 선고를 진행하려던 재판장 앞에 한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방청석 1열에 앉아 손을 든 여성의 모습에 재판장은 선고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장 : 지금 ○○○ 피고인의 판결을 선고하는데 왜 손을 드시죠?
여성 : 잠깐만요 재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재판장 : 누구신데요?
여성 : 저는 ○○○의 아내 ○○○입니다. 급하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재판장 : 무엇이지요?
여성 : 피해자와 합의가 다 됐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금액 1억 원이 도착할 때까지 1시간 여가 필요합니다.
재판장 : 1시간이요?
여성 : 다 됐는데 1시간 정도가 필요해서, 오늘이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피고인은 지난 2019년 7월 서울 강남구 한 사무실에서 피해자 A 씨로부터 10억 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습니다. 피고인은 A 씨에게 "B 주식회사의 전환사채 130억 원어치를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할 예정"이라며 "10억 원을 빌려주면 두 달 뒤 22억 여원으로 갚겠다"고 돈을 송금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금 대부분이 확보되었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A 씨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피고인은 이미 3차례나 동종 범죄 처벌 전력이 있었고 재판 중 도주하기도 해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2023.10.16. 선고)

그런데 2심 선고 직전 피고인의 아내가 등장해 '피해자와 합의가 됐다'며 1억 원을 입금하겠다는 겁니다. 입금까진 1시간 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피고인 측은 입금 후 피해자가 써 준 합의서를 법원에 제출해 감형을 받아볼 요량이었을 겁니다.

재판장은 즉시 답했습니다.
 
재판장 : 1시간이 필요하면요, 이따 4시쯤 선고하죠.
재판장 : 그전까지 합의서 제출해 주시고요, 그때도 합의서가 없으면 그땐 그냥 4시에 선고합니다.
여성 : 네! 그전까지 합의서 제출하겠습니다.

2시간이 미뤄졌습니다. 사기 사건의 형사 재판에선 '처벌'만큼 '피해 회복'도 중시됩니다. 1~2시간 정도 시간을 미뤄 일부라도 피해 회복이 이뤄진다면 선고를 미룰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이날 전산망에도 2시간 뒤로 변경된 선고기일 일정이 다시 떴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판사들은 이례적이지만 충분히 있을법한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한 지방법원 부장 판사는 "선고 들어가기 직전까지 합의서 등 참고 서면이 추가로 들어온 게 없는지 확인한다"며 "특히 사기 사건의 경우 혹시 직전에라도 피해 회복이 이뤄졌다면 선고 기일을 변경해 다시 판결을 선고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고등법원 부장 판사는 "사기 사건의 경우 선고를 앞두고 막판 합의에 나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가짜 합의가 아닌 진짜 합의가 이뤄지는지 확인할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맞다"며 "선고 당일 법정 문을 열고 들어와 합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재판의 결과는 바뀌었을까. 사기 사건을 많이 판결해 본 판사들은 '돈이 입금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예상을 내놨습니다.

오후 4시 다시 법정으로 가 선고를 지켜봤습니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랐습니다. 결과는 '항소 기각'이었습니다. 1억 원은 입금되지 않았고 합의서도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원심과 같이 징역 3년 6개월이 나왔습니다. 피고인 측은 '가족이 금전을 준비했지만 시한 내에 입금이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판결문에 적시된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하였고, 피해 회복 역시 이루어지지 아니한 점…'이란 내용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측이 실제 돈을 입금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이조차도 거짓말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재판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재판장은 또다시 시간을 벌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고인이 호소하는 마지막엔 피해자의 회복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현교 기자 yh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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