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서 보는 법을 배우다 [여여한 독서]
가와우치 아리오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펴냄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가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그림을 보러 다닌 경험을 쓴 책이다. 하루가 다르게 눈이 나빠져서 걱정인 나는 시각장애인에게 유대감 비슷한 것을 느끼던 터라 책 소개를 보자마자 흥미가 동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그림을 본다고? 어떻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시라토리 씨랑 함께 작품을 보면 정말 즐거워! 다음에 같이 가자.” 친구 마이티의 말에 솔깃한 아리오, 그는 나와 똑같은 의문을 품고서 두 사람을 따라 미술관에 간다. 그리고 마이티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라토리에게 그림을 말로 설명해준다. 아,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림을 본다는 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구나. 그런데 시라토리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왜 그림을 보러 다니지?
몇 달 전 시각장애인 화가 마뉴엘 솔라노 개인전을 보았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눈이 안 보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색감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었다. 솔라노는 스물여섯 살에 HIV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충격으로 한동안 그림을 포기했지만 결국 촉각에 의지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기만의 작품 세계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엔 귀여운 어린이들이 등장하는데, 새로운 시각 이미지가 없어서 과거의 기억 속 이미지로 작업하기 때문이라고. 그 작품들을 보며 눈이 안 보여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표현하고 싶은 열망이 있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표현하는 것과 감상하는 건 다르지 않을까. 더구나 중도 장애인 솔라노와 달리 시라토리는 처음부터 심각한 약시로 태어나 스무 살 무렵부터는 빛조차 보이지 않게 된 전맹이다. 빛과 어둠 외에는 아무런 시각적 인상도 없는 시라토리는 어쩌다 그림 감상에 진심이 된 걸까? 답은 2장에 나온다. 그를 미술관으로 이끈 것은 ‘호감 가는 여성’이었다. 좋아하는 여성을 따라 다빈치 전시회에 갔던 그는 이를 계기로 그림 관람에 흥미가 생겼고, 어느 날 미술관에 전화해 “저는 전맹인데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설명해줬으면 합니다”라고 안내를 부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맹인답지 않은 행동이라 재미있어서” 그랬다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한두 번 재미 삼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몇 년씩, 그것도 본래의 업인 안마사를 그만두고 아예 미술 관련 활동에 전념할 만큼 계속한다는 건 영….
아무튼 이후에도 아리오와 친구들은 시라토리와 여러 미술관을 다니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같은 세계적인 작가의 전시부터 오타케 신로의 드로잉, 일본의 전통 불상, 장애인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두근두근 전시회’ 등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다. 그중엔 한국의 유명한 아티스트 정연두가 시라토리가 찍은 사진을 가지고 만든 비디오 작품도 있다. 한데 이 수준 높은 예술을 감상하는 이들의 대화는 시답잖은 수다 수준이다. 일테면 국보 천수관음상을 앞에 두고, “헤어스타일이 식당 아주머니 같아” “이 아주머니 볶음밥은 맛있을 거야” “손에 든 저 병에는 간장이 들어 있겠네!” 하는 식이다. 난 이 대목에서 책을 덮을 뻔했다. 이런 수다를 봐주기엔 내 눈은 너무 소중하다고!
‘보이는 것’을 넘어선 세계의 다른 경계
물론 틈틈이 고상한 깨우침도 있다. 가령 예술적 심미안을 가진 아리오와 마이티가 똑같은 작품을 놓고 이야기하는데도 보는 것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리오는 ‘보기’가 시각의 영역을 넘어 뇌 과학의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즉 사물을 볼 때 우리는 눈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기초해 해석하고 이해한다”. 이런 경험은 눈이 보이는 아리오에게 ‘본다’는 것, 미술을 ‘감상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깨우침을 준다. 그래서 그는 계속 시라토리와 함께 그림을 본다.
그가 이 경험을 400쪽 넘는 책으로 쓰고도 모자라 다큐멘터리 영화로까지 만든 건 시각에 대한 새로운 각성 때문만은 아니다.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기던 내가 어느 순간 눈에 불을 켜고 탐독하다가 감동에 겨워 다 읽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건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심미안 때문이 아니라 예술을 요구하는 인생의 간절한 필요 때문이었다. 그를 통해 예술을 보는, 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며 예술이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하는 놀라운 책이다. 그 시작엔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전맹인 시라토리가 있고, 그 어려움을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유희로 여기는 아리오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어려운 예술을 통해 훨씬 더 어려운 현실의 문제들과 대면한다. 장애와 비장애, 삶과 죽음, 꿈과 현실, 앎과 무지, 이해와 오해, 살아도 좋은 인생과 살 필요가 없는 인생을 나누는 우생사상, 너와 나, 그 모든 경계.
내가 시답잖다고 여겼던 그들의 대화는, 시인 함민복이 노래했듯, 모든 경계에서 피어난 꽃이다(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는 시구를 즐겨 암송했지만 문장에 담긴 뜻을 깊이 헤아린 것은 눈이 보이는 친구들과 보이지 않는 친구가 함께한 이 책을 읽고서였다. 예술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국보 관음상 앞에서도 거침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의 불경이 진실에 다가서는 걸 보며, 비로소 나는 내 안에 오래 묵은 오만과 편견을 직시할 수 있었고 시각을 넘어선 세계의 다른 경계를 힐끗 볼 수 있었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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