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으론 밸류업 어렵다 : 역설의 성적표 [視리즈]

김다린 기자 2024. 6. 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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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커버스토리
밸류업 100일의 기록➊
새해 첫날 거래소 찾았던 尹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방점
밸류업으로 체질 개선 꾀해
발표 초반엔 반짝 반등했지만
이내 시장 투자자 반응 냉랭
체질 개선 조짐 안 보이는 증시
밸류업 프로그램이 베일을 벗은 지 100일이 지났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우리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데 힘을 쏟아붓고 있다. 새해 첫날부터 대통령이 거래소를 찾을 만큼 정성이다. 지난 2월 26일 베일을 벗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런 노력을 담은 청사진이다. 기업들의 가치 제고 작업을 투자자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걸 정부 차원에서 돕기로 했다. 잘하는 기업은 따로 뽑아 표창하는 방식으로 '당근'도 준다. 한마디로 투자자들이 기업에 믿고 투자할 만한 분위기를 돋우겠다는 거다.

# 문제는 시장의 반응이다. 밸류업을 발표한 지 100일이 흘렀는데도 증시 분위기는 얼음장 같다. 증시 체질 관련 지표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지수는 박스권에 갇혀 있다. 밸류업 관련주로 꼽힌 종목은 앞서가긴커녕 뒷걸음질만 쳤다. 밸류업을 아무리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진한다지만,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출발했다는 걸 고려하면 못마땅한 성적표다.

# 이런 지표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밸류업으론 밸류업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더스쿠프가 밸류업 발표 100일간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금융당국은 지난 2월 밸류업 프로그램의 골자를 공개했다.[사진=뉴시스]

지난 2월 26일,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연구원, 한국상장사협의회, 코스닥협회 등이 한데 모였다. 한국 자본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집합한 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KRX마켓스퀘어 콘퍼런스홀에서 열린 이 행사의 이름은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 1차 세미나'. 소문만 무성하던 'K-밸류업 프로그램'이 베일을 벗는 자리였다. 모습을 드러낸 프로그램의 골자는 간단했다. 기업이 직접 기업가치를 제고할 계획을 수립하고, 공시하고, 이행하도록 유도하는 거였다.

앞으로 기업들은 기업개요, 현황진단, 목표설정, 계획수립, 이행평가, 소통 등 6개 항목을 기입하고 시장에 공개한다. 공시는 연 1회가 기본. 2년차 땐 전년도 계획과 이행 평가도 포함해야 한다. 계획이 틀어지면 연중이라도 수시로 공시하도록 했다.

공시 참여 여부는 자율에 맡겼다. 대신 잘하는 기업에는 당근을 주기로 했다. 매년 5월 기업가치 제고 우수기업 10여곳을 선정해 기업 밸류업 표창을 수여한다. 표창을 받은 기업은 각종 세정 지원을 받는다.

아울러 기업가치 제고가 기대되는 상장사로 구성된 시장 지수인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개발하고, 이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도 연내 출시한다. 기업 스스로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분위기를 증시 전반에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밸류업은 인공지능(AI)과 더불어 올해 상반기 한국 증시를 가장 뜨겁게 달군 키워드였다.

관심에 불씨를 댕긴 건 대통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새해 첫 거래일인 1월 2일에 한국거래소 증시 개장식에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발언했고, 곧장 실행 계획이 나왔다.

같은 달 17일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은 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을 강조하면서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투자자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당국은 상장기업이 직접 주주환원 정책을 내도록 하고, 이를 유도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준다는 대강의 밑그림을 덧붙였다. 그로부터 40여일이 흐른 2월 26일, 정부는 앞서 언급한 세미나를 통해 밸류업의 실체가 드러났다.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2024년 들어 미국ㆍ일본 등 주요국 증시가 사상 최고가 행진을 거듭했는데, 한국 증시는 그럴 기미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기대감은 차트에도 즉각 반영됐다.

윤 대통령의 발언 직후 국내 증시에선 '밸류업 테마주'란 이름이 붙은 종목을 중심으로 투자 열풍이 일었다. 당국이 테마주를 공인한 건 아니었고, 대체로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업종이 포함됐다.

이유가 있었다. PBR은 시가총액을 순자산으로 나눈 값이다. 이 값이 1배를 밑돌았다는 건 시가총액이 순자산 가치에도 못 미칠 만큼 주가가 저평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저평가의 정상화'가 밸류업의 취지인 만큼, 이런 종목들이 수혜를 입을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활발한 주주가치 제고 활동으로 충분히 주가를 부양할 수 있으면서도 현금흐름이 양호한 종목의 이름은 연일 차트에서 빨간불을 켰다. 대표적 저低PBR 업종인 보험, 증권, 은행, 자동차, 지주사 등의 상승세가 뚜렷했다.

자, 이제 밸류업 프로그램이 베일을 벗은 지 100일이 지났다(6월 5일 기준). 냉정히 따지면 밸류업은 아직 준비 단계다. 정부는 "준비가 된 상장기업부터 공시한다"고 했지만, 기업가치 제고를 공시한 회사는 키움증권뿐이다.

한국거래소는 기업 밸류업 정보를 제공하는 통합페이지를 구축할 예정인데, 이 역시 론칭 전이다. 구체적인 인센티브 내용도 오는 7월 말 발표하는 2025년도 세법개정안에 담길 전망이다. 금융당국이 내놓기로 한 코리아 밸류업지수 ETF는 연말쯤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주식 시장의 속성을 고려하면 '발표 뒤 100일'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주가는 미래가치를 선반영한다. 최근 윤 대통령이 동해 심해 유전 탐사 시추 승인 소식을 전하자, 석유 개발주가 일제히 급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 매장량과 경제성을 확인해야 하고, 상업 개발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도 투자자들은 '먼 미래'에 베팅했다.

이렇듯 투자는 미래 가치를 향한 기대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주식시장엔 밸류업 기대감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과연 한국 증시에선 과거와는 다른 변화가 나타나고 있을까.

밸류업 프로그램이 가동했지만, 증시의 체질 개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사진=뉴시스]

■ 밸류업 100일의 기록 = 증시의 체질을 판단하는 주요 지표로는 PBR과 주가수익비율(PER), 배당수익률 등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PBR은 시가총액을 기업의 순자산으로 나눈 비율이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비율이고, 배당수익률은 현 주가 대비 매년 얼마의 배당금을 지급하는지를 나타낸다.

애초에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한 배경도 우리 증시의 지표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가령, PBR은 1.05배(코스피 0.95배, 코스닥 1.96배ㆍ2023년 말 기준)로 선진국(3.10배)은 물론 신흥국(1.61배)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수준을 보였다.

그렇다면 밸류업 기대심리가 작용한 지난 100일의 증시 흐름은 어땠을까. 5일 종가 기준 코스피의 PBR 지수는 0.98배로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 날(코스피 0.96배)과 별반 차이가 없다. 코스피 상장 종목 924개 중 57.5%에 이르는 531개 종목이 PBR 1.00배를 밑돌았다. 100일 전엔 530개 종목이 1.00배 미만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황당한 건 지난 100일 총 67거래일 동안 코스피의 PBR 지수가 1.00배를 넘어섰던 적이 없었다는 거다. 코스피 PBR이 1.00배로 기업들의 순자산이 시가총액과 동일했던 것도 13거래일뿐이었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베일을 벗었는데도 5일 중 하루는 PBR 1.00배를 밑도는 '저평가' 상태였다는 거다.

산업별 최우량 200개 종목을 한데 모은 '코스피200' 지수의 PBR을 따져 봐도 체질 개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100일이 지났건만, 여전히 1.00배(0.97배)를 밑돈다. 이 지수의 PBR이 1.00배를 넘어섰던 건 총 67거래일 동안 11거래일뿐이었다.

코스닥도 상황은 비슷했다. 성장주가 모인 시장인 덕분에 PBR 지표가 코스피보단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100일간의 흐름은 나빴다.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하기 전엔 1.93배였는데, 100일 뒤엔 1.93배로 저평가 상태가 되레 악화했다.

코스닥지수의 PBR이 2.00배에 도달하거나 넘었던 건 13거래일뿐이었고, 나머지 거래일엔 1.88~1.99배 수준에 그쳤다. 코스닥이 벤치마킹했던 미국 나스닥의 PBR이 5배를 훌쩍 넘는 걸 고려하면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쳤다. 애초에 PBR이 1.00배를 밑도는 코스닥 상장사가 수두룩했다. 전체 1608개 코스닥 상장사 가운데 595개로, 셋 중 하나는 그랬다.

실적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주가 부양 목표는 물거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사진=뉴시스]

시가총액을 당기순이익으로 나눠 계산한 PER 지표에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프로그램 발표 전엔 19.44배였던 코스피의 PER은 100일 뒤 20.54배로 소폭 올랐다. PER은 높을수록 회사가 거둔 이익에 비해 주가가 높다는 걸 의미한다.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이익은 감소한 반면 주가 수준은 크게 변동하지 않자 PER이 높아진 거다.

배당 수익률이 짜기로 유명한 증시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주주의 수익률과 직결되는 지표인 코스피의 배당수익률은 100일 전엔 1.82%, 현재는 1.87%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코스닥은 0.56%에서 0.55%로 떨어졌다. 1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3.34%,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국고채 수익률에도 크게 못 미쳤다.

그렇다면 한때 밸류업 테마주로 묶이면서 주가가 출렁였던 종목들의 현재 주가 상태는 어떨까. 視리즈 밸류업 100일의 기록, 두번째 기사에서 알아보자.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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