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친한 남성 손에 죽는 여성들…‘K-교제살인’의 성 정치학 [정지혜의 빨간약]
세상은 ‘공부, 공부’하느라 뒷전이 된 한국의 인성교육 현실에 혀를 찼지만 이런 범죄에서 핵심과도 같은 ‘성별’이라는 요소는 굳이 부각하지 않았다.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는 범죄),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 여성혐오 범죄의 범주로 보는 시선은 여전히 부족했다.
②지난 1월에는 부산 서면의 한 오피스텔에서 20대 여성이 추락해 숨졌다. 전 남자친구와 다투던 중 창틀에 매달렸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남성은 헤어지자는 여성을 수시로 찾아와 폭력을 일삼고, 17시간 동안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자메시지 등으로 괴롭혀 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은 ‘스토킹 추락사’로 명명됐으나 별다른 사회적 파장을 낳지는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발생 중이며, 앞으로도 나올 일이란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③약 두 달뒤인 지난 3월 경기 화성시에서 20대 남성이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피해자와 동거하던 오피스텔에서 피해자가 이별을 통보하려 하자 범행을 저지른 그는 평소에도 집착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졌다. 피해자의 어머니 앞에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어머니까지 살해하려 한 범행의 잔인성 등을 고려해 검찰은 김레아(26)의 신상을 공개했다.
④거제에서는 지난 4월 전 여자친구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남성 김모(20)씨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헤어진 상태였다. 여성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알아내 집에 침입한 남성이 자고 있는 피해자를 때려 뇌출혈 등 전치 6주 진단이 나왔다. 피해자는 입원 치료 중 상태가 악화돼 숨지고 말았다. 검찰은 남성을 상해치사, 스토킹 처벌법 위반, 주거침입 혐의로 5월30일 구속기소했다. 이번에도 사회적 반응은 미미했다.
‘수능 만점 의대생 교제살인’과 ‘거제 전 연인 폭행치사’ 사건의 가해 남성들이 각각 구속기소된 지난달 30일 서울에서 또 한 건의 교제살인이 발생했다. ⑤강남구 선릉역 인근 한 오피스텔에서 60대 여성 A씨와 그의 30대 딸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남성 박모(64)씨가 사건 발생 당일 긴급 체포됐다. 경찰에 따르면 A씨와 6개월 정도 만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진 박씨는 A씨의 이별 통보에 보복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60대 남성의 모녀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이틀 전인 5월28일에도 경찰에 교제 살인 관련 신고가 접수됐다. ⑥경남 창녕에서 30대 남성이 연인 관계였던 3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해자는 5월22일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가해 남성은 범행 6일 만에 경찰에 자수한 뒤 승용차 안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에서 숨졌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비극은 이어졌다. ⑦5월30일 베트남 하노이 시내 한 호텔에서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연인 관계인 30대 한국 여성을 살해한 20대 한국 남성이 현지에서 체포됐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범행 후 가해 남성 이모(24)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의도로 호텔 꼭대기 65층으로 올라갔지만 경비원에게 제지당했고, 이후 수상한 거동으로 신고를 당해 현지 공안에 붙잡혔다.
올 상반기 동안 발생한 가장 끔찍한 교제살인을 정리한 것만 7건에 달한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여성이 결별을 통보하거나 성관계 요구에 응하지 않자 남성이 보복 △범행 뒤 스스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범행 전에도 자신의 ‘죽음’을 들먹이며 여성을 협박·스토킹한 점 등이다.
위의 사건들은 빙산의 극히 일부다.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 말까지 접수된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2만5967건, 검거된 인원은 4395명이다. 매달 1000명 넘게 교제폭력으로 경찰에 붙잡히는 것이다. 신고된 경우에 한정된 통계이니 실제로는 더 많은 피해가 발생 중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올라가는 숫자는 사안의 심각성을 보여주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여성이 입는 피해에 무감해진다. 가까운 사이의 남성에게 여성이 목숨을 잃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면서 구문(舊聞)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자극적인 뉴스에 둘러싸이면서 더 이상 충격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두기는 일정 부분 사회의 ‘의도적 외면‘이 작용한 결과다. 정말 자기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못 본척 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인 교제살인에서 희생자가 될 확률이 낮은 남성의 공감대가 떨어지는 점, 여성 입장에서도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난 아닐 거야’라며 부정하거나 아예 생각하지 않는 쪽으로 방어기제가 나타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약자가 당하는 일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체념과 비관이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정치, 언론, 지식인 등이 사회적 약자를 충분히 대변하지 않음으로써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켜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현상을 그대로 비추기만 할뿐 사회를 나아가게 하지 못하니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친한 남성의 손에 죽는 여성들
해를 거듭하며 늘어나는 교제폭력·살인 현황은 성별에 기반한 범죄, 페미사이드 문제를 더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친밀한 관계 폭력(IPV·Intimate Partner Violence)’이 보편적인 개념이다. 우리도 IPV가 법·제도적으로 도입되고, 그 의미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현행법은 혼인·혈연관계에 국한해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을 바라보고 있어 한계가 뚜렷하다.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왜 안 만나줘’ 범죄를 분명한 하나의 범주로 놓고, 애착을 느끼는 여성에게 거절당하는 남성의 폭력 행위에 대한 분석과 사전 예방을 위한 교육, 단호하며 강화된 처벌에 이르는 전방위적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가기엔 현실에 너무 큰 괴리가 있다. ‘남성을 여성과 똑같이 챙겨달라’는 K-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남성 세대에 대해 “성평등 의식이 높아졌다”고 착각하는 사회이니 무리도 아니다. 이런 남성들의 눈치를 보느라 여성 대상 폭력은 더더욱 의제로 다뤄질 기회를 잃는 와중에, 가임기 여성들에게는 출산을 요구하는 사회의 뻔뻔함 앞에서 이들은 긴 말 대신 조용히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로 답하고 있다.
IPV의 핵심이 뭘까. 남성의 여성 살해 대부분은 가까운 사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인 기대를 가졌다가(이성 관계 지속을 기대했다가) 무너졌을 때 폭발하는 경향이 있다. 일면식도 없는 여성이 희생되기도 하지만(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많은 경우 남성이 특정 여성에게 품었던 감정이 배반당했다고 여길 때 폭주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신체적,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겪는 험한 세상의 단면을 쉴 새 없이 보여주는 사회는 여성들에게 ‘듬직한 남성 파트너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파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듬직한 남성’에게 폭력을 당하는 여성의 현실은 상대적으로 감춰진다. 이 대목에서 성별 권력의 작동을 여성 스스로 읽어내야 하는 이유다.
그런 다음엔 불평등한 성별 권력 관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 및 소유욕 등으로 발생하는 교제살인, 페미사이드가 결국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통계를 집계하는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는 이유는 ‘여성이 남성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아서’로 귀결된다.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보복을 해 버리는 행동에는 상대를 평등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개념이 상실돼 있다.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의식과 기존에 자리잡은 개념을 바꾸는 데는 지난한 노력이 든다. 우리보다 앞서 성 불평등 문제를 인지하고 개선한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 결국 답은 교육과 정치에 있다.
“우리도 아직 성평등은 달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스웨덴에서는 구성원들의 인권 평등 의식이 자연적으로 꽃필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비롯한 성평등 교육을 의무화하는 이유다. 인권 감수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는 바탕인 것이다.
성평등 교육과 같은 의도적 개입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교육도 정치도 이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됐다. 빈자리를 파고든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 등이 단단한 매노스피어(남성계 커뮤니티)를 구축해 왜곡된 성 인식을 학습시키는 동안 사회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믿을 구석 하나 없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며 자신의 삶을 도박하듯 걸어버릴 여성은 얼마나 될까. 날짜와 장소만 업데이트 될뿐 반복되는 비슷한 패턴의 여성 대상 폭력, 이를 보면서 눈 하나 깜짝 않는 사회에 살면서 이들은 변화를 기대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있다.
기사 서두에 나열된 끔찍한 교제살인 사건들 이후 우리 사회에 바뀐 것이라곤 무엇이 있나. ‘안전 이별’을 검색해 본 적 있는 전국의 많은 혼자 사는 여성들이 집 비밀번호를 바꾸고 문단속을 더 철저히 하는 정도로 그치는 사회에 ‘출산율 반등’ 같은 얼척 없는 희망이 가당키나 한지 묻고 싶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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