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해줘서 고마워”…16년 다닌 구글의 통보에도 웃은 이유 [주말엔]

서다은 2024. 6. 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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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갭이어(Gap Year):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또는 휴학 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흥미와 적성을 찾아가는 기간을 말한다


정김경숙(로이스 킴) 씨는 16년간 일한 구글에서 한순간에 정리해고 메일을 받았습니다.

비원어민 최초로 구글 미국 본사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의 디렉터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기의 바둑 대결 '알파고 챌린지' 행사를 총괄 지휘하기도 했던 정김 씨.

일요일만 되면 회사에 가고 싶어 설렐 정도로 '뼛속까지 구글러'라는 애칭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경력으로 <유퀴즈>와 <세바시> 출연까지 했던 그녀, '내 인생의 최고점'이라고 느끼던 순간에 '날벼락'을 맞은 겁니다.

■ "이제 내가 필요 없다고?"

2016년 구글 딥마인드 ‘이세돌 vs 알파고 대결’ 총괄 지휘를 맡은 정김경숙 씨


2023년 1월 20일 금요일, 정김경숙 씨는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회사 계정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구글이 일부 직원을 감원하기로 했고,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그 대상이 되었다'는 메일이 와있었습니다.

만우절도 아닌데 아침부터 장난 메일이 온다며 웃으며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온 부사장의 전화에 실제 상황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메일 아직 안 읽었어요? 안타깝게도 로이스의 팀이 없어졌어요."

2023년 초 구글이 감행한 1만 2천여 명의 정리해고 명단에 정김 씨의 팀이 포함된 겁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너무 놀라면 전혀 와닿지가 않잖아요. 처음에는 현실감이 없었고, 그다음에는 화가 난 게 컸던 것 같아요. '나를 아무도 원하지 않아? 내가 필요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어떻게 네가 감히 나를…….'"

■ 쉰 살 넘어 얻게 된 '갭이어(Gap Year)'

정김경숙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찾아온 동시에, 엄청난 감정의 동요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지금까지 앞만 보며 일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꼭 하고 싶었지만 회사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
1) 슈퍼마켓에서 일하기: '트레이더 조'의 크루 멤버 되기
2) 공유 운전 플랫폼(우버나 리프트)의 운전사 되기
3) 스타벅스 바리스타 되기
4)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5) 꽃집에서 일하기
…….

목록을 작성하다 보니 하고 싶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내 인생에 언제 또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갭이어(Gap Year)를 내가 언제 또 가져보겠어! 정말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자."

■ 실리콘밸리 'N잡러' 아르바이트생

(좌) 트레이더 조 (우) 스타벅스 근무 모습


가장 먼저 아르바이트 지원서를 낸 곳은 미국의 마트 체인 '트레이더 조'였습니다.

평소 동네에 있는 트레이더 조를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행복해 보이는 직원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마트 아르바이트생을 시작으로 공유 운전 서비스 리프트의 운전사, 스타벅스 바리스타, 고양이 펫시터(반려동물 돌보미), 스타트업 마케팅 컨설턴트 등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바쁜 일요일의 경우엔 새벽 3시에 일어나 트레이더 조 매장으로 근무를 하러 가고, 오후 1시에 끝나면 바로 스타벅스로 향해 오후 8시쯤 일이 끝났습니다.

고양이 펫시터 일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리프트 승객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1시간가량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함께 놀아주고 난 후에야 집으로 출발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 집을 나선 지 약 19시간 만이었습니다.

"제 일정표가 비어있는 게 무서울 것 같은 거예요. 제 성격상 바쁘지 않으면 자꾸 과거를 회상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빨리 찾아가서 나 자신을 바쁘게 몰아붙여 보자는 게 있었죠. 저에게 맞는 처방을 내렸던 것 같아요."

■ '날 것의 나'를 만나다


정김경숙 씨는 N잡러로 보낸 1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 잘했다!"

먼저, 정리해고로 인한 불안감이나 조급함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몸뚱이'를 쓰는 육체노동자로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겁니다.

또, 은퇴 예행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밝힙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시간, 갑작스럽게 끊긴 인간관계, 갑작스럽게 사라진 경제력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겁니다.

'나'를 설명하는 가장 큰 수식어를 잃고서도 살아남는 법을 체득한 정김 씨는 발가벗겨진 내 모습도 충분히 멋지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소속과 직업을 심장처럼 생각합니다. 사실 그건 아니거든요. 구글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뗀 '날 것의 나'도 충분히 괜찮고 멋지다는 걸 알았어요. 여기서 오는 자신감이 너무 좋아요. 우리가 '직업=나'라고 하는 걸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구글, 날 놓아줘서 고마워!"

정김경숙 씨는 꼭 정리해고라는 모습이 아니어도 인생에서는 예기치 않은 변화가 원하지 않는 때에 온다고 말합니다.

그 상황에 끌려가지 않는 자신만의 세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해 목록을 만들어보자.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하자.
적극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사람들을 만나자.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정김 씨는 해고 당시부터 아르바이트생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엮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요.

소중한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놓아준 구글이 이제는 고맙다며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지난 1년은 계획하지 않았던 변화로부터 다시 인생의 주도권을 찾은 신나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롭게 'N잡'을 시작하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준 구글, 날 놓아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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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다은 기자 (stande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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