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도 '밀양 신상털기'…가해자 보호받고, 피해자는 더 궁지로
경찰, 피해자에 막말 등 인권 침해
법원, 피의자 '앞날 있어' 처벌 미약
솜방망이 처벌에 무분별 사적 응징
"미성년 등 피해자 회복 대책 절실"
한 유튜버가 2004년 경남 밀양시에서 발생했던 집단 성폭행 사건(이하 밀양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을 지난 1일 공개하면서 충격적이었던 범행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4년 1월 밀양 지역 고등학생 44명이 온라인 채팅으로 만난 여중생을 1년간 집단으로 성폭행한 이 사건은 당시 청소년이었던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 공분을 샀다.
유튜버들의 뒤늦은 가해자 응징에 여론은 호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피해자의 고통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건 당시에도 경찰에서 흘러나온 정보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상이 알려지면서 2차 피해가 발생했다. 수사를 맡았던 경찰관들의 피해자에 대한 막말과 비인권적 수사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20년 만에 재연된 가해자들의 신상 털기도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는 근본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경찰, 피해자에 "밀양 물 흐려놨다"
밀양 사건 수사를 맡았던 울산남부경찰서의 비인권적 수사 행태가 도마에 올랐다. 2004년 11월 사건을 신고한 피해자 측은 비공개 수사를 원했지만, 경찰은 피해자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피해 사실을 언론에 제공해 신원을 노출했다.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조사에서도 여성 경찰관을 배치하지 않았고, 별도의 범인 식별실이 갖춰져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게 했다. 한 형사는 피해자를 향해 "너희가 밀양 물 다 흐려놨다"는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의 이모 A씨는 "이럴 줄 알았다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수사관이 애들에게 수치심을 느끼는 말들을 반복하게 하거나 피의자를 버젓이 앞에 두고 진술을 받는 등 피해자로서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고 분노했다. 경찰관 4명은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며 피해자에 대한 욕설과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대법원은 2008년 6월 피해자 측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경찰의 인권 침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직무상 의무를 소홀히 해 원고들에게 불필요한 수치심과 심리적 고통을 느끼게 했다"며 총 5,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밀양 사건 이후 미성년자 피해자의 진술권 보호를 위해 녹화진술 제도를 의무화하는 규정이 시행됐다.
피의자 보호 강화되고, 피해자 이사 후에도 고통
역설적으로 밀양 사건을 계기로 수사기관의 피의자 인권 보호 원칙은 강화됐다. 당시 누리꾼들이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뒤져 피의자 신상을 알아내 불거진 청소년 피의자 인권 침해 논란이 계기였다. 경찰이 피의자에게 모자와 마스크 착용을 허락하는 관행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피의자 호송 업무 개선을 경찰에 권고했다. 경찰청도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을 마련해 피의자나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장면을 촬영하지 않도록 했다.
청소년이었던 피의자들의 처벌은 미약했다. 검찰은 피의자 44명 가운데 범행에 적극 가담했던 10명만 특수강간 등 혐의로 기소했다. 부산지법 가정지원은 이 중 1명에 대해 장기 소년원 송치 결정(7호 처분·2년 이내), 4명에 대해 단기 소년원 송치 결정(6호 처분·6개월 이내)을 내렸다. 나머지 5명은 장기보호관찰과 80시간의 사회봉사활동 등을 명령했다. 당시 성범죄는 피해자나 고소권자가 직접 고소해야만 수사와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2013년 폐지)였기 때문에, 고소장에 포함이 안 돼 처벌을 피한 이들도 있었다. 44명 전원이 전과 기록 한 줄 남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는 살던 지역을 떠났고, 고통에 시달렸다. 가해자 부모들은 피해자가 전학 간 학교를 찾아가 고소 취하 등을 종용했다. 피해자 아버지가 친권을 행사하며 합의에 나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경감됐다.
밀양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미영 전 울산여성의전화 회장은 "재판 당시 수험생이었던 가해자들에게는 '앞날이 있지 않냐'는 논리가 적용됐고,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관용적이었다"며 "판결로 경종을 울리지 못했기 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폭력 범죄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적 응징, 피해자 고통만 가중
여론에 부응하지 않은 처벌은 뒤늦게라도 가해자를 응징하겠다는 사적 제재를 불렀다. 유튜버들은 가해자들의 얼굴과 실명, 나이, 직장, 가족관계 등을 경쟁하듯 공개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신상이 공개된 가해자들은 생계 위협을 받고, 직장에서 해고됐다.
문제는 이 같은 무분별한 사적 응징이 피해자의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피해자에 해당 사건을 상기시켜 고통을 가중하는 '2차 가해' 우려가 크다. 밀양 사건 피해자 측을 지원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유튜버들의 가해자 신상 공개에 "피해자가 동의한 바 없다"고 강력 항의하며 관련 영상 삭제를 요청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은 "유튜브 콘텐츠를 위해 피해자가 희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밀양 사건뿐 아니라 2020년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이 출소했을 때도 200여 명이 넘는 유튜버가 경기 안산을 찾아 생방송을 진행하거나 범법 행위를 저지르며 정의 구현을 부르짖었다. 조두순에 대한 대중의 분노만 자극했을 뿐 피해자 보호나 아동 성폭행 방지 등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과거보다 SNS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빠르고, 확산하는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내용도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위험이 있다"며 "공권력을 믿지 못하고 처벌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적 제재를 정당화한다면 비슷한 사건에 대해 모두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처하는 식의 악순환만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밀양 사건 피해자 주치의였던 신의진 연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년 전 참담했던 사건을 떠올리고 가해자가 부각되는 것 자체가 회복하려는 피해자에게는 '2차 가해'가 된다"며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특히 미성년자가 성범죄 피해자인 사건에 있어서 유튜버 등이 자극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경우 국가가 심의하거나,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규정이 절실하다"고 당부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60610340003227)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60616190001600)
김소희 기자 kim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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