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원 "20대에서 상담 전화 잦아…부채·취업 문제" "봄철·공휴일·주말에 전화 더 많아"…타인과 비교 영향 "따뜻한 위로와 경청, 전문 기관 추천으로 방지" 교육계 "관계 중심적인 교육으로 박탈감 막아야"
[서울=뉴시스] 오정우 기자 =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전화한 남성이 있었어요. 담배 한 개비만 피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생명의전화 상담원 박인순(70)씨는 9일 뉴시스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내담자로 A씨를 떠올렸다.
20대 후반 남성 A씨는 대학을 졸업하면 밝은 앞날이 열릴 거라고 믿고 지냈다고 한다. 학자금 대출도 취업만 하면 충분히 갚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길어지는 생활고에 한 번 받은 카드 대출은 돌려막기를 위한 추가 대출로 이어졌다. 소위 말하는 '막노동'까지 시작했지만 불어난 채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생각한 A씨는 극단적 시도를 위해 한강을 향했다. 그러곤 마지막 결심 전에 눈에 들어온 생명의전화를 들었다가 박씨와 연결됐다.
박씨는 떠올렸다.
"버거울 정도로 감당이 안 되니까,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됐겠어요? 학교를 졸업했어도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모든 상황이 따라주지 않고, 그걸 오롯이 스스로 감당하려다보니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화기 너머의 A씨에게 박씨가 건넨 말은 일단 '라이터를 버려라,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계속하자'였다. 차분한 대화 끝에 A씨의 마음도 누그러졌고, 구조도 됐다.
박씨는 "A씨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 몇 년 뒤에 다시 전화가 온다. 몇 년 전에 이곳에서 전화를 들었다가 도움 받아서 정말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며 "열심히 일하고 돌아가는 길에 수화기를 들었다면서. 저로써는 얼마나 감사하겠나. 그런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9년째 상담을 해왔다는 박씨는 기로에 놓인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히어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 일종의 특화된 상담 스킬이다.
그는 "사실 그분들은 생을 마감하고 싶다기보다는 내면에서 '난 정말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수화기를 드는 것"이라며 '손을 내밀어 주고 붙잡아주는 것'이 상담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사람 중에는 정말 다 쏟아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니까 얘기를 들어보면 어디에서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구나,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10년째 생명의전화 상담을 병행하는 나지훈(47) 대구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매주 금요일 오후 9시부터 토요일 오전 9시까지,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비상대기'를 한다.
최근에는 20대로부터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나 교수는 "봄, 주말, 공휴일에 특히 전화가 많이 온다"며 "남들 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뒤처져 있는 느낌이 들 때 그런 생각,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더라"라고 했다.
이어 "(생명의전화 내담자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통계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22년 사망원인통계'를 살펴보면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1만2906명이다. 이 중 20대에서는 10만명 당 21.4명 수준의 극단적 선택이 있었다.
나 교수는 그런 20대에게 위로를 건넬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가령 도박 문제와 그 부채로 다리 위에 섰던 20대 내담자에게 그는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을 추천했다고 한다. 나 교수는 "전문적인 국가 기관을 알지 못해 끙끙 앓다가 안타까운 시도를 하려는 이들도 있다"며 "당사자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주변의 관심과 위로, 공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상담에 선행해 근본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중 자살률 1위에 평균보다 2배 이상 높다"며 "나라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20대가 타인과의 비교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며 건전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교육계 변화를 촉구했다.
최영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최근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각자의 베스트 모멘트를 올리는데 여기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학생들 사이에서는 '올려치기' 당한다고 표현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관계 중심적인 교육을 늘리지 않으면 고립될 가능성이 커진다"며 "영어, 수학보다 관계 중심적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 교수는 상담원이 아닌 어떤 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다고 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에요. 따뜻한 위로와 경청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게 될 겁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