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한국인 추모비 너무 크다” 반발, 좌초 위기... 北 방해 공작 가능성도
군부 강경파, 아웅산 묘역에 건립 불만…복교한 北 의식도
2013년 北 테러 30주년 맞춰 세우려던 계획 수정, 재협의
무산될 우려 커지자 규모 축소해 2014년 현충일에 제막식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6월6일자 ‘MB, 대통령 때 아웅산 테러 현장 29년만에 참배...표지석 하나 없었다’ 에서 계속> 미얀마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받은 지 6개월만에 아웅산 묘지 단지 시설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왔습니다. 아웅산 묘지 경호동 건물에 인접해 있는 부지 약 260㎡(약 76평)를 내주겠다는 겁니다. 양상훈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미얀마가 제시한 현장이 추모비 건립 장소로 적합한지 취재해보라며 저를 양곤에 파견했습니다.
2012년 12월 현장을 방문했을 때 정문은 굳게 닫힌 채 나이 어린 인부들이 정원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미얀마 정부가 제시한 부지는 정문 주차장 옆에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들어서자 나무 사이로 아웅산과 독립 영웅을 추모하는 빨간색의 추모탑이 보였습니다. 이 추모탑과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 건립 부지 사이에서 1983년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추모비가 건립될 경우, 나무를 제거해서 현장 조망이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주미얀마 대사관의 윤강현 공사참사관(법무법인 세종 고문. 주이란 대사·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 역임)은 “미얀마 정부가 제시한 260㎡의 부지가 넓은 편은 아니나, 아웅산 묘지 단지에 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추모비가 아웅산 국립묘지 단지 내에 있으며 사건 현장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어서 관련 행사를 할 때 편리하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주미얀마한국대사관은 추모비가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쉐다곤 파고다’와 1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세워지게 되는 것에 의미를 뒀습니다.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를 대표하는 불교 건축물로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불교 성지로 꼽힙니다. 이곳은 2012년 11월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맨발로 이곳을 거닐어 주목받은 곳입니다.
이어서 2013년 2월 당시 서정인 외교부 남아태국 심의관(현 코이카 감사. 전 주멕시코 대사)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조사단이 정식으로 파견돼 현장을 조사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이때 우리 측에 추모비가 들어설 아웅산 묘지에 별도의 출입문을 내고 인근 시설과 구별되도록 조경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 박근혜 정부가 계승, 추모비 건립위원회 발족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같은 보수 정부이면서도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 여러 면에서 차별화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 이를 계승해 추진하기로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초 미얀마 정부가 제시한 아웅산 묘지 경호동 건물에 인접해 있는 부지를 추모비 건립 터로 최종 수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권철현 당시 세종재단 이사장(전 주일대사, 국회의원 역임)을 위원장으로 한 민·관 합동 건립위원회가 2013년 3월 4일 출범했습니다. 건립위원회엔 외교부, 국가보훈처, 세종재단, 조선일보사가 참여했습니다. 세종재단은 아웅산 테러 희생자들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현지 추모비 건립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시 공식 수행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기백 전 국방부장관(전 합참의장), 현장에서 순국한 고(故) 서석준 전 부총리의 부인 유수경 국민대 명예교수, 박해윤 외교부 남아태국장, 김미진 홍익대 교수, 박정훈 조선일보 부국장 등 민관 위원과 건축·조경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건립위는 2013년 10월 9일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 30주년에 맞춰 테러 현장에 추모비를 건립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권 이사장은 “테러가 일어난 지 30년 만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이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며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순국 사절들을 나라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자세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기백 전 국방장관은 “미얀마에 추모비 건립에 나선다는 보도를 접하고 자원봉사라도 하려 했다”며 “나이가 많아서 큰 힘은 못 되겠지만, 다른 위원들을 도와 추모비 건립이 국민운동이 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건립위는 이후 총 11차례 회의를 갖고 추모비 건립을 위한 예산 및 실행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 미얀마 강경파 반대에 부딪쳐 좌초 위기
건립위가 의욕적으로 츨범했지만 곧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미얀마 정부 강경파가 한국인 테러 희생자 추모비를 아웅산 묘지 단지에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국교를 재개한 북한의 반발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아웅산 테러를 부인하고 있는데, 테러 현장에 추모비를 세우는 것이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미얀마는 특히 추모비 설계안이 크다고 문제제기했습니다. 원래 설계안은 약 4개 면으로 된 박스형 디자인이었습니다. 추모객이 그 내부에 들어가면 한쪽 벽면 틈으로 빛이 들어오게 하는 대형 시설이었습니다. 추모비 안에서 참사현장을 바라보며 추모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묘지 전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1개의 벽면으로 하고 벽면의 높이도 낮춰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미얀마의 문제 제기로 2013년 10월 아웅산 테러 30주년에 맞춰 제막식을 가지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돼 건립 사업 자체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건립 관련 예산을 모으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부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한참 동안 추모비 건립 사업이 진척되지 않아 좌초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건립위 내부에서는 해외에서 대통령 방문 중 17명이 북한 테러로 숨지는 대참사가 발생했고, 30년 만에 세우는 것이므로 원안대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디자인을 미얀마가 수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모비 규모 문제로 장기화하다가 자칫 무산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공작도 있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규모를 축소해서라도 신속하게 추모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논의를 거친 끝에 2014년 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방한한 우나 마웅 르윈 미얀마 외교장관을 만나 원안보다 축소된 규모로 추모비를 세우기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이어 3월에 양곤 주정부로부터 추모비 건립을 허가받아 6월 6일 현충일에 건립비 제막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여러 논의를 거쳐 정부 예산 외에도 세종재단,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세종재단의 기부금 등으로 총 7억3000만원의 기금을 모았습니다.
◇ 높이 1.5m, 가로 9m 규모의 추모비 건립
최종 건립된 추모비는 높이 1.5m, 두께 1m 가로 9m 규모로, 대형 비석에 17인의 순국자 이름이 직책이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테러가 발생한 현장과 약 100m 거리로, 추모비 한 가운데 손 한 뼘 너비의 틈이 있는데 이를 통해 비극의 장소를 직접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추모비는 김미진 홍익대 교수가 총괄 기획을 맡고, 건축가 박창현씨와 조형미술가 고산금씨, 이수학 아뜰리에나무 대표가 각각 건축 설계와 조형미술, 조경을 맡았습니다.
6월 6일 추모식에는 서석준 부총리의 장·차남을 비롯한 순국사절 유족 23명, 당시 부상을 입었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 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 김상영 전 문화공보부 직원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권철현 추모비 건립위원장, 송영식 전 대사(테러당시 공관 차석), 임성준 전 차관보, 이백순 주미얀마대사, 송대성 세종연구소장 등 6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제막식에 참석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2년여 동안 추모비 건립을 위해 협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배려를 확인했다. 특히 내년(2015년) 양국 수교 4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추모비 건립은 큰 의미가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를 향한 역사의 전진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평화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고인들은 바람이 되고 햇볕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아세안(ASEAN)+3 정상회의 및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참석을 위해 미얀마를 방문했으나 양곤의 순국사절비는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2019년 4월 미얀마를 공식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순국사절 추모비를 참배, 이곳을 찾은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 됐습니다.
[P.S.]
1. 이명박 정부의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은 2012년 4월 비밀리에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미얀마가 북한과의 무기 거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미얀마는 이를 받아들여 세인 테인 미얀마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과의 무기 거래를 금지한 유엔 결의 1874호를 지키겠다고 밝히게 됩니다.
2. 당시 미얀마에는 탈북자 1명이 약 1년간 수감돼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 탈북자를 대통령 전용기로 함께 귀국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얀마는 머지 않은 시기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탈북자는 이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직후 태국의 방콕을 거쳐서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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