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지하철 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황시운 소설가(=강연) 2024. 6. 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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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 투명일기] ⑨ 황시운 소설가

경희대학교와 노회찬재단은 2023년 1학기부터 200여 명의 학생이 듣는 교양강좌 '후마니타스 특강 : 6411의 목소리와 노동존중 사회'를 협력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노회찬재단이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재 칼럼 '6411의 목소리' 필자를 매주 한 명씩 모셔 한 학기 동안 특강으로 운영합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6411 당사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해주는 자신의 삶과 노동 이야기를 <프레시안> 지면으로 중계합니다.

아홉번째는 소설가 황시운 씨의 이야기입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그는 산책을 하다 마주친 수많은 '턱'과 지하철을 타다 마주친 '틈'이 자신을 가로막은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턱'과 '틈'은 황 씨에게는 '등 돌린 세상'의 표지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솔직한 경험담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전과는 다른 관점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소설 쓰는 황시운이라고 합니다. 어저께 비가 와서 오늘 또 비가 오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 다행입니다. 비가 오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은 외출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우산을 쓸 수 없는 것도 불편하지만, 비가 오면 휠체어가 되게 미끄럽거든요.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장애인 이동권 이야기입니다. 장애인 이동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텐데요. 주로 소셜미디어나 기사에 나온 장애인들의 사진일 거예요. 고성을 지르고 경찰들과 대치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이라든가, 젊은 층은 몹시 사랑한다는 모 정치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수염이 잔뜩 난 어떤 대표 아저씨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바쁜 출근 시간에 지하철 바닥을 줄지어 기고 있는, 어딘가 기괴해 보이는 모습이 떠오르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떠오르는 게 잘못됐다거나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중증 장애인과 같이 생활하면서 자라왔다면 덜 그랬겠지만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우리 한국 사회가 아직 그럴 기회를 많이 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장애인 이동권은 지지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 반대하는 분도 계실 수 있는, 그런 거대한 담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것보다는 좀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인데, 저의 산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장애인 이동권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턱과 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건강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산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산책을 아주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치기 전까지는요.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하고, 또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일상을 좀먹는 불안이라고 해야 되나요? 이런 것들을 잠재우기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하는 사람이었어요. 보통 스트레스를 술 아니면 산책 둘 중 하나로 풀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두 가지 다 잘할 수가 없게 됐어요. 술을 아주 좋아했지만 지금은 술을 마시면 약이 잘 듣지 않아 통증이 굉장히 심해져 마실 수가 없고요. 산책 나가면 수많은 턱과 틈 때문에 산책이 너무 어려워져 예전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할 수가 없게 됐어요.

'하반신 마비'는 걷거나 서지 못하는 것만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저에 대한 정보를 조금 드리려고 하는데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36살 때까지는요. 2011년 5월 17일 추락 사고로 척추가 부러지면서 척추 안에 있는 흉수가 손상되면서 하반신이 마비된 중도(中道) 장애인입니다. 사고가 나고 한동안은 제 세상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척추가 부러지면서 내 세상도 완전히 부러져버렸다'라고 생각했어요. 수술을 여러 번 받았음에도 신경이 완전히 마비됐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사고가 났을 때는 살려달라고 사람들한테 애원했는데, 다시는 걷거나 설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사고 났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난 게 너무나 억울할 정도로 화가 났었습니다. 저를 살리려고 가족을 비롯해 많은 분이 애쓰셨을 텐데, 그 보람도 없이 저는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나 그때는 그 궁리만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나가 아니고요. 당시에 죽고 싶어도 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그런 형편이었거든요. 병실 밖으로 나가는 건 고사하고 침대 아래로 내려올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죠.

하반신이 마비된다는 건, 몸의 일부가 마비된다는 건, 그냥 걷거나 서지 못하는 것 그 상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런 불편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저도 처음에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간혹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보통 휠체어에 그림처럼 앉아 무릎에 담요 덮고 휠체어를 살살 조금씩 밀고 조금씩 움직여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요. 저도 그러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걷고 서지 못하는 거는 아주 기본적인 거였고, 다른 문제들이 더 컸어요.

제일 큰 문제가 신경을 다쳤기 때문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요. 요의나 변의가 전혀 없어요. 소변이 마려운 것도 모르고, 대변이 마려운 것도 모르죠. 소변을 스스로 볼 수가 없으니 요도로 카테터를 넣어서 빼내거나, 아니면 방광에 직접 관을 삽입해서 소변 백이라는 비닐 백을 차고 다니면서 그 백에 소변을 받아서 그걸 버리거나 이렇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고요.

대변도 스스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 맞춰서, 하루에 한 번 몇 시, 이틀에 한 번 몇 시,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서 관장약을 넣고 억지로 빼내는 거죠. 그 방법밖에 없거든요. 처음에 친구들한테 가끔 농담처럼,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요의를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가 있어요. 방광이 빵빵하게 차 가지고 금방이라도 오줌 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있죠. 너무 괴롭잖아요. 그랬다가 변기에 앉아 소변을 딱 봤을 때, 그 쾌감이라고 해야 되나. 그 시원한 기분을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좀 변태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느낌이 되게 그립다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또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방광이나 신장이 급속도로 나빠져요.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알 수 없는 위험 속에 있게 돼요. 관을 통해 소변을 빼내는 거기 때문에 시간을 못 맞추면 소변이 신장으로 역류한다든지, 아니면 소변을 보기 위해 연결했던 관이 꼬이거나 접혀서 막혀가지고 역류한다든지 하면 신장이 망가지거든요. 그러면 혈액 투석을 해야 되는 일이 발생하겠죠. 사람은 다 늙으니까 장기가 망가지는 건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근데 장애를 갖게 되면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죠. 또 마비된 부위에 근육이 다 빠져버려요. 제가 지금 이렇게 몸이 거대하지만, 상체는 근육이 있지만 하체는 근육이 없이 순전히 지방과 가죽만 남았어요. 괄약근도 근육이잖아요. 괄약근이 빠져 제기능을 못하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소대변도 마음대로 스스로는 볼 수가 없게 된 거죠.

일반적인 형태의 성교도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당연히 임신과 출산도 조금 까다로워집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고 까다로워져요. 그다음에 피부가 굉장히 약해져서 욕창이 잘 생기게 돼요. 욕창이 심해지면 패혈증이 와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골다공증도 되게 급속도로 진행돼 가지고 뼈가 잘 부러지기도 해요. 걷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총체적으로 나빠지는 게 문제였어요. 또 운이 나쁘면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는 흉추 11번, 12번, 요추 1번까지 부러져 신경을 완전히 다쳤는데요. 이러면 신경병증성 통증에 시달리게 돼요.

통증이 어떻냐면, 두 다리가 터질 것처럼 조여들어요.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아프기도 하고요. 좀 징그러운 표현일 수도 있는데 아주 예리한 칼로 살을 포 뜨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사포 같은 걸로 살을 갈아내는 것처럼 너무 화끈거리고 아릴 때도 있고요.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살 껍데기가 홀랑 벗겨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프거나,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기도 해요. 이런 신경병증성 통증을 하루 종일 느끼는 거예요. 통증이 파도치는 것처럼 일렁일렁하면서 아주 심해졌다 조금 약해졌다를 반복하면서 24시간 계속되는 거죠.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통증 때문에 잠자기도 힘들어요. 오늘 강의를 하기 위해서도 평소보다 많은 약을 먹었어요. 비마약성 신경계통 약을 먹기도 하고, 마약성 진통제를 많이 먹어요. 부작용 문제가 존재하는 펜타닐 패치 같은 것도 붙여요. 그렇게 하면서 통증을 다스리는데,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에요. 계속 아프고 밤이 되면 더 많이 아파요.

독한 약을 먹으면서도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다치기 전에도, 지금도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요. 너무 다행스럽게도 머리를 다치지 않아서 인지장애가 없었어요. 목이 부러졌다면 사지 마비가 됐을 텐데, 허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두 손은 쓸 수가 있는 거예요.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제 직업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병원에 있을 때 만났던 아주 많은 마비 장애인 중에 원래 직업으로 돌아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거의 다 새로운 일을 알아봐야 하거나, 평생 직업을 갖지 못하거나에요. 운이 좋아 합의금이나 보험금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사람도 간혹 있겠죠. 그런 사람들은 돈 걱정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직업도 없이 정부 지원금 같은 데 기대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인생이 비참해지는 경우가 많겠죠.

그리고 헌신적인 가족이 있어서 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좋은 환경에서 적절한 케어를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어요. 부모님은 간혹 '진작 결혼했으면 남편이 너를 돌봐줬을 텐데 결혼도 안 하고 있다가 다치는 바람에 이게 뭐냐. 인생이. 그러게 왜 그렇게 늦장을 부렸냐?' 말씀하시는데 저는 남의 집 귀한 아들 인생까지 저랑 같이 진창으로 끌어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살고 있습니다.

▲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 경사로에서 한 시민이 휠체어 탄 가족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켜 주고 있다. ⓒ연합뉴스

다시 산책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산책 얘기로 돌아가면, 다치기 전에는 글이 막히면 무조건 산책을 하러 나갔어요. 소설을 쓰다 막히면 그냥 바로 나갔어요. 새로운 길을 걸었던 것도 아니에요. 안양에 교도소가 있는데 교도소를 끼고 도는 담장길이 있어요. 그 길을 걷는 걸 좋아했었어요. 썩 아름답고 그런 길은 아니었는데 익숙한 길이었으니까. 그 길을 걸으면서 소설이 막히면 새로운 방향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깃감을 찾기도 하고. 제가 썼던 소설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자의식으로 가득 찬 쓰레기인지 깨닫기도 하고, 소설의 첫 문장이나 제목을 떠올리기도 하고. 등단하고도 청탁이 잘 오지 않는 퍽퍽한 일상을 견디는 힘이기도 했고. 새로운 소설을 생각해내는 힘이기도 했는데 그걸 못하다 보니 글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술도 먹을 수 없고 외출도 할 수 없고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냥 앉아 있거나 아프면 눕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하다 보니까 뇌에 자극이 가질 않는 거죠.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낸다는 게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생각이 드는 거죠. 소설 쓰지 않는 인생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소설을 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지내니 책도 잘 읽어지지 않았어요. 글자는 읽는데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죠. 진짜로 죽을 게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또 재활 훈련을 받다 보니까, 저같이 마비된 환자들한테는 휠체어가 다리 대신이라는 걸 천천히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어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런 걸 받아들이니까 다시 산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용기를 내야겠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내서 나가야겠다. 다치기 전에 꽤 괜찮은 상을 받았거든요. 그 전까지 등단하고도 청탁을 받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그 상을 받고 내 인생이 앞으로 좀 좋아지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사고가 나고 아무것도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내 소설을 사람들은 결국 아무도 읽지 않게 되겠지. 그게 너무 두렵기도 하고요.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휠체어로 산책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는 잘 몰랐던 거죠.

머릿속으로 휠체어 탄 사람이 산책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그냥 휠을 굴리면 바퀴가 떼구르르 굴러가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가니까 산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재활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을 때는 실내고, 다 갖춰진 환경이었기 때문에 산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별로 못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젊었으니까 근력도 더 좋았고요. 훈련을 받으면서 휠체어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앉는 '트랜스퍼'라든지, 휠체어 앞바퀴를 들어 큰 바퀴로만 움직이는 '휠라이'라든지, 이런 게 다 가능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도 나는 잘 다닐 수 있을 거야, 큰 문제없을 거야' 생각하고 퇴원했어요.

막상 나가니까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거예요. 처음에 목표로 삼은 게 아파트 단지 밖에 있는 조금 큰 GS마트에 가는 거였어요. 살 건 딱히 없지만, 우유라도 하나 사와야지 생각했어요. 활동 보조 선생님하고 같이 갔죠. 나갔는데, 그냥 잠깐, 늘 다니던 마트에 다녀오는 건데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땀도 나는 것 같고, 두근거리고, 너무 흥분이 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어요. 횡단보도 앞에서 용기를 내 휠체어를 굴려 앞으로 한 발 나갔죠. 마트까지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어요.

잘 갔다 올 수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활동 보조 선생님이 별 생각 없이 도와주려고 그러셨을 거예요. 말씀을 안 하시고 휠체어를 밀어주셨어요. 가속이 붙었는데 횡단보도에서 인도로 올라가는 곳에 연석이 있잖아요. 아마 5cm도 안 될 거예요. 그 턱을 미처 못 본 거죠. 턱에 휠체어가 걸려 넘어가면서 제가 떨어졌어요. 바닥을 구르는데 별로 아프지는 않았어요. 하반신이 마비됐기 때문에 하반신에는 뼈가 부러진다든지 살이 찢어진다든지 했을 때 느끼는 통증을 전혀 못 느끼거든요. 상체도 마약성 진통제를 많이 먹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황시운 씨는 어디 가서 누가 길 가다 몽둥이로 막 두드려 패도 별로 아프지 않을 거다. 그만큼 약을 많이 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좋은 게 아니다. 약을 줄여야 된다' 그러니까 어디가 아프지는 않었어요. 그런데 떨어졌을 때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기 쉽고, 2차 장애가 올 수 있으니까 떨어지는 게 무서운 거죠.

떨어진 게 아파서가 아니라, 늘 다니던 길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잖아요. 나 혼자 제대로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도 혼자 제대로 못해내다니' 하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좌절감이 느껴지고 힘이 들었어요. 그리고 넘어졌을 때 운이 좋아 다치지 않았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길을 만들 때 장애인은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

얼마 후에 또 일어난 일인데요. 휠체어를 탈 때는 실내화를 신어야 돼요. 맨발로 있으면은 발가락을 다칠 수가 있기 때문에 집에서도 실내화를 신어야 돼요. 겨울에 부츠처럼 생긴 털실내화를 신고 있었어요. 발이 너무 차고 혈액순환이 잘 안 돼 그걸 신고 있었는데 안에 실이 늘어져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모르고 별 생각 없이 신었어요. 한참 있다 소변 백을 비워야 돼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휠체어를 빼는데 바닥에 피가 흥건한 거예요. 실내화도 피에 젖어 있고요. 너무 놀라 실내화를 벗어보니까 발톱이 들렸더라고요. 실에 끼면서 그랬나 봐요. 상처가 났는데 관리를 잘 안 하면 욕창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걸 관리하느라 몇 달 동안 침대 생활을 했어요.

마비된 몸으로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자꾸 소심해지더라고요. 통증은 우리 몸의 위험 신호잖아요. 통증을 못 느끼니까 내가 위험해져도 위험해진 걸 모르는 거예요. 진짜로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밖에 나가긴 나가야 되겠는데, 나가는 게 너무 무섭고, 위험해 보이고, 이래서 또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됐어요.

횡단보도 턱에 걸려 넘어진 날, 뼈가 부러지가나 살이 찢어지는 상처는 안 입었지만, 그 길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어요. 그때 처음 보이기 시작했어요. 길에 수많은 턱이 있다는 걸요. 건강할 때 당연히 몰랐죠. 장애를 얻고 난 후에도 재활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턱의 위험성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현실로 나와 보니까 알게 된 거죠. 몸으로 직접 겪고 나서야 알게 된 거예요. 그 뒤부터는 턱과 틈, 그리고 계단이 인생을 가로막는 것 같은, 삶을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번번이 늘 문제였어요.

아까 말씀드린 보도의 연석이 만드는 턱이 제일 문제인데, 도로에서 인도로 올라가는 길이나, 인도와 인도가 연결되는 곳에 연석이 있잖아요. 인도 쪽에 연석이 있고 사람들이 보행할 수 있게 낮은 곳 바닥에 연석을 묻죠. 처음에는 턱이 없이 만들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턱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곳은 깔끔하게 마감하지 않고 턱을 그대로 놔두고 그냥 공사를 끝내기도 해요.

저 같은 척수 장애인은 활동형 휠체어를 타야 돼요. 일반 휠체어를 타면 척추 측만이 오거든요. 활동형 휠체어는 앞바퀴가 작기 때문에 휠체어가 아주 낮은 턱에도 걸려 넘어질 수가 있어요. 턱을 미리 보고 앞바퀴를 들어주는 '휠라이'를 해서 넘어가면 상관 없는데, 그 턱을 미처 발견 못했을 경우에 앞바퀴가 탁 걸리겠죠. 그러면 휠체어가 앞으로 확 쏠리면서 넘어가 버려요. 사람이 떨어지겠죠. 그래서 이 턱이 아주 굉장히 큰 문제가 돼요.

인도 보도블록 자체도 문제예요. 여성분들 하이힐 신고 다니면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하면 굉장히 불편하잖아요. 남자분들도 불편하실 거예요. 그런데 불편하다고 인도로 걷는 걸 포기하고 차도로 가지는 않죠. 인도로 가긴 하잖아요. 간혹 전동 휠체어나 휠체어가 차도로 가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대체로 그 인도가 휠체어가 다니기엔 너무나 불편하기 때문에 차도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전신주가 박혀서 인도가 좁아서 휠체어가 못 지나는 경우도 있고요.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유럽이나 이런 곳은 보도블록을 쓰지 않고 도로를 포장해가고 있다고 해요.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한테 너무 불편하고, 유아차들한테도 불편하고, 지팡이 짚고 다니는 노인들한테도 불편하고, 시각장애인들한테도 위험하니까요.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게 하지 않고 연말만 되면 보도블록을 걷어냈다 깔았다만 반복하죠. 그거라도 제대로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아서 금방 또 보도블록 곳곳이 훅 꺼져버려요. 턱이 생기고 깨지고 틈이 생기고 그런 일이 반복돼요.

그렇기 때문에 제 산책 코스는 주로 근린공원이나 체육공원 같은 곳에서 아주 무미건조하게 정해진 트랙을 뱅뱅 도는 거예요. 그것 밖에는 안전한 산책길이 별로 없어요. 그곳도 지하철역을 건너야 되기 때문에 역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동네에 꽤 괜찮은 산책 코스가 있기는 해요. 골프장 주변에 조성한 길인데 동네 주민들이 많이 다니녀요. 길 중간에서 전시회 같은 것도 간혹 해요. 오래된 길이기 때문에 큰 나무가 많아서 그늘도 많고 꽃도 예쁘게 피어 있고 꽤 아름다운 길이라는데 저는 가보지 못했어요. 왜냐면 중간중간에 아마 물빠짐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멍석 같은 걸 깔아놨어요. 그런 걸 깔아 놓으면 휠체어가 앞으로 잘 나가질 않아요. 아예 자갈을 깔아놓은 구간도 있고요. 흙길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어요. 길을 조성할 때 애초에 휠체어에 대한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던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 좀 마음이 아픕니다.

가게를 갈 때 먼저 고려한 것은 가격도 서비스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산책을 가는 길에 다니던 커피집이 하나 있었어요. 얼마 전에 문을 닫았어요. 이제 동네에서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커피집이 존재하지 않아요. 동네마다 커피집이 정말 많잖아요. 저희 동네도 그런데 그 많은 커피집 중에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커피집이 그곳 딱 한 군데밖에 없었어요. 다 턱이 존재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누군가 휠체어를 들어주면 들어갈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다니는 게 너무 좀 이상하잖아요. 제 나이가 50인데 엄마를 어디나 다 데리고 다닐 수 없잖아요. 또 활동 보조 선생님과 늘 어디나 함께 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혼자 가고 싶은 길이 있잖아요. 그러다 커피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문 앞에서 전화를 해서 직원분을 불러내거나 밖에서 크게 불러요. 직원분이 나와주시면 그분한테 카드를 드리고 커피를 한 잔 달라고 주문을 한 뒤에 그분이 커피를 가지고 나오면 받아오는 수밖에 없어요. 직원분은 또 얼마나 귀찮으시겠어요?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하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세상이 나한테 너무 불친절할 것 아닌가'

경사로도 문제에요. 커피숍이나 식당이나 많은 가게를 보면, 경사로가 가파른 곳이 많아요. 경사로를 만드는 게 의무인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좋은 의도에서 경사로를 만드셨을 거예요. 일부러 돈을 들여서. 그런데 휠체어가 올라올 수 있는 각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미처 못하신 거죠. 또 어떤 곳은 경사로를 기껏 만들었는데 끝을 딱 잘라서 턱이 생기게 만들어놔요.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휠체어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실질적으로는 별로 없어요. 저는 시골이 아니라 수도권에 사는데도 불편한 점이 이렇게 많은데 시골에 사는 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오늘 강의한다고 미용실 예약을 했거든요. 제가 다니던 미용실이 문을 닫았더라고요. 갑자기 엄마랑 저랑 바빠진 거예요. 제가 갈 수 있는 미용실을 알아봐야 되잖아요. 턱이 없어야 되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되고.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미용실들이 배수 문제 때문에 샴푸실을 한 단 높게 만든 곳이 많아요. 그러면 휠체어가 갈 수가 없으니까 샴푸실에 턱이 없어야 되고요. 샴푸하는 의자에 앉으려면 휠체어에서 뛰어올라 다른 곳에 앉는 트랜스퍼를 해야 돼요. 의자가 너무 높으면 누가 도와줘도 뛰어오를 수가 없어요. 샴푸 의자에 발판이 있으면 또 휠체어와 의자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다친 이후로는 가격이나 디자이너의 솜씨가 고려 대상이 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내가 들어갈 수 있냐? 샴푸 의자에 옮겨 앉을 수 있나?' 이것만 중요했고 혹시 머리가 이상하게 돼도 컴플레인을 걸지 못했어요. 어렵게 찾았는데 괜히 얼굴 붉혔다 민망해지면 가기 힘들잖아요. 그러다 눈탱이를 맞았어요. 요금을 너무 비싸게 받는 거예요. 뭐라고 하지 못하고 냈어요. 왜냐하면 다음번에 또 그 미용실에 가야되거든요.

몸이 아픈 것도 통증도, 걷지 못하는 것도 다 고통이었지만 갈 수 없는 곳이 너무 많다 보니까 사고 이후로 진짜 충격이고 괴로웠던 건 세상이 나한테 등을 돌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는 거였어요. 일상생활을 내 힘으로 하지 못하고, 굳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게 됐을 때 너무 큰 좌절감, 상실감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통증이 있는 몸으로 소설을 쓰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데.

저는 사실 삶을 치열하게 살아본 적은 없는 사람이에요. 학교 다닐 때도 막 열심히 공부하고 막 이러지 않았었어요. 뭔가 고통스럽게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인간관계도 힘들다 싶으면 관계를 단절하는 쪽을 선택했었고요. 뭘 10년 이상 꾸준히 열심히 해본 게 소설 쓰는 것 말고는 없어요. 진짜 너무나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설 쓰는 게 고통인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저는 식당에 가기 위해서도, 미용실에 가기 위해서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도, 주차를 하기 위해서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데도 뭔가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사고로 몸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일상생활을 하는데 다 뭔가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날 때가 되게 많았었어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더 형편이 어렵거나, 더 몸이 아픈 중증 장애인들은 사는 게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휠체어로 지하철 타기, 뭐가 문제냐고요?

'휠체어로 지하철 타기 뭐가 문제냐고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요. 그 칼럼의 원 제목이 '등 돌린 세상'이었어요. 벌써 재작년 봄 일인데요. 친구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가기로 했어요. 저희 집이 안양이라 인덕원역에서 친구들과 만나 세 정거장을 가 대공원역에 내리면 갈 수 있어요. 지하철로 그냥 세 정거장 가는 거였는데, 환승 구역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그렇게 어려웠거든요. '세상이 나한테 정말 등을 돌려버렸구나'하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인덕원역까지는 교통약자 이동 지원 차량이 있어서 그걸 타고 출구에 가서 친구를 기다렸죠. 에스컬레이터가 올라오는 출구였는데, 올라오는 사람들마다 다 쳐다보는 거예요. 정말로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사람들은 무슨 의도를 갖고 쳐다본 게 아니라 그냥 올라왔는데 마침 있는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까 그냥 눈이 간 거죠. 별 생각 없이 봤을 텐데 저는 그 시선을 다 의식하고 있었어요. 지하철역이니까 사람이 되게 많잖아요. 거의 10년만에 혼자 용기를 내서 멀리까지 나와본 거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막 다 쳐다보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고, 제가 사고 트라우마로 불안장애 약하고 공황장애 약도 먹고 있거든요.

괴로워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가 와서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막 쫄아있다 친구가 와주니까 괜히 기운이 나잖아요. 친구한테 그랬어요. '이거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아. 나 어쩌면 지금까지는 못했는데 앞으로는 혼자 지하철 타고 너희 만나러 서울로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얘기하니까 친구가 '그럴 수 있겠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 잘 됐다' 얘기하면서 막 격려를 해줬거든요.

승강장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기다렸죠. 지하철 승강장에 휠체어 표시가 된 곳이 있어요. 거기서 타면 휠체어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에서 기다리다 아무 문제없이 지하철을 탔어요. 또 기운이 막 샘솟는 거예요. '진짜로 이렇게 쉽네. 아니 이렇게 쉬운데 나는 10년 동안 도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나 진짜 너무 게으르고 그동안 너무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하고, 친구한테도 '나 진짜 혼자서 너희들 만나러 갈게. 언제든 시간 내줘야 된다'고, 막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치기 전에 친구들과 약속 장소가 항상 시청역이었었어요. 미술관 가는 걸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시청역에서 만나서 덕수궁미술관에 가든, 서울시립미술관에 가든, 아니면 종로 있는 갤러리에 다녔어요. 약속이 없을 때는 혼자 가서 거기를 산책하듯 돌아다녔어요.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힘이 들 때마다 미술관을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다친 뒤로 10년이나 그걸 못했던 게 너무 후회가 되는 거예요. 제가 그동안 지하철이건 뭐건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불러내 줄 때나 강의 요청이 있을 때 거의 다 거절했거든요. 제가 말과 글로는 '장애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장애인들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 자꾸 세상밖으로 많이 나와야 된다'고 했지만 사실 저는 세상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놓는 게 불안했다고 해야 할까요. 부끄러움하고는 좀 다른 건데, 그게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지하철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시간들을 반성하고 있었어요. 내릴 역에 오니까 반대편 문이 열렸어요.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틈이 너무 넓은 거예요. 지하철에서 '승강장 사이 거리가 멀다고 발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안내 멘트가 나오잖아요. 그런 곳에서 내리려고 보니까 제 휠체어 앞바퀴가 빠질 수밖에 없는 넓이의 틈이 있는 거예요. 수도 휠체어를 타고 있었으면 앞바퀴를 드는 휠라이를 제가 아직 할 수 있기 때문에 건너갈 수 있었을 텐데 그날은 수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어요. 수동 휠체어에 모터를 단 것이기 때문에 무게가 3배 정도 나가요. 거의 30kg이 넘어요. 앞바퀴 크기는 거의 비슷해요. 제가 그걸로는 휠라이를 못하거든요. 앞바퀴를 못 드니까 내릴 방법이 없는 거예요. 지하철 문은 열렸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문이 닫혀버렸어요. 사실 별일 아니잖아요. 지하철역 한두 정거장은 졸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거고, 다시 내려서 반대편 차량을 타고 오면 되는 걸 저도 뻔히 알고 있는데 너무 불안한 거예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다음 정거장까지 가는 동안 막 땀이 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너무 힘들어하고 있는데, 친구가 육아 경험이 있는 친구라 제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유아차 앞바퀴 들듯이 휠라이를 해서 저를 내려줬어요. 반대편 승강장으로 넘어가서 또 친구가 도와줘서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대공원역까지 갔어요. 이번에도 승강장 사이에 틈이 넓어서 친구가 또 도와줬어요. 친구가 있으니까 갈 수는 있었어요. 가는 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데 혼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 희망이 깨진 거죠. '혼자 갈 수 없구나' 다시 미술관 나들이를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좋아했는데 다시 그렇게 생각되니까 마음이 너무 뭐랄까. 푹 주저앉으면서 그때부터는 뭐가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래서 그날 관람을 뭘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숨이 막히고 계속 힘이 들었었어요. '추가 약을 먹어야 되나' 고민할 정도로 너무 힘든 날이었어요.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인덕원역에서 친구들이 집에 가는 걸 보겠다고 저를 바래다줬어요. 집에 가는 걸 보겠다고요. 인덕원역까지 데려다 줘서 힘들지 않게 왔는데 같이 또 밥을 먹고 가자는 거예요. '오랜만에 힘들게 만났는데, 밥도 안 먹고 헤어질 수는 없지 않냐' 그래서 또 인덕원역에서 밥집을 찾아서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도 턱과 틈이 없는 밥집을 찾아 돌아다녔죠. 지긋지긋하게 틈과 턱 얘기만 하는 것 같겠지만, 정말 휠체어를 타고 나가면 지긋지긋하게 틈과 턱과의 싸움이 계속 반복됩니다.

밥집을 찾는데 지은 지 오래된 건물들이다 보니 턱이 다 높은 거예요. 휠라이를 해 거기 올라가려면 휠체어 앞바퀴를 턱에 걸친 다음에 뒤에서 들어올려야 돼요. 그런데 제 덩치가 작은 것도 아니다 보니 턱에 걸치고 들어 올리려는데 잘 안 되더고라고요. 마지막에는 한 밥집 앞에서 친구들하고 막 결의를 다졌어요. 역시나 턱이 높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친구가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더 해보겠다고 휠체어를 뒤로 확 제쳤는데, 제가 덩치가 크니까 친구가 순간적으로 무게를 감당을 못한 거예요. 놓칠 것 같으니까 저는 저대로 막 버둥대고. 얼마나 꼴이 희한했겠어요 위험한 것도 위험한 거였지만 남들이 보면 정말 웃긴 꼴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안에서 보고 있던 어떤 남자분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나오시더니, 사방에서 휠체어 프레임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서 저를 식당 안으로 들여보내 주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역시 혼자서 외출하는 거는 무리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집에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누워서 다 돌이켜봤죠. 사람들이 다 쉽다고 하는 쉬운 지하철 타기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그보다 어렵다는 버스는 탈 수 있을까? 저상버스가 많이 다니고 있고 서울은 특히나 많이 다니고 있다는데, 그리고 경기도도 이제는 많이 늘었다는데 여전히 저상버스가 아닌 경우가 많고, 버스에 타면 사람들 시선이 굉장히 불편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니 버스 탈 자신은 정말 없더라고요.

▲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출근길 장애인 지하철 탑승 시위. ⓒ연합뉴스

기술과 돈이 없어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나아지지 않은 걸까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하철에 장애인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있기는 해요. 장애인들이 미리 전화해서 '내가 어떤 열차를 타고 있어서 몇 시쯤 도착하니까 나와서 도와주세요' 하면 휴대용 경사로를 가지고 나오셔서 밑에 깔아주신다고 그래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이고 앓느니 죽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출퇴근처럼 복잡한 시간이면 더 어렵겠죠. 장애인들이 다 출퇴근도 안 하고 집에만 있다 다 낮에만 다니는 사람들도 아닐 텐데 매일매일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틈을 해결하는 방법이 없지도 않을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런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닐 것 같고 돈이 없을 것 같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불편하게 그냥 계속 이렇게 놔둬도 되는 걸까요. 아직까지 장애인들의 불편이 그 예산만큼 중요하지가 않은 거죠.
2023년 기준 우리나라 등록 장애인 비율이 5.1%라고 해요. 비등록 장애인도 많겠지만 등록 장애인만 놓고 생각해 본다면 100명 중에 5명이겠고요. 그중에서 또 52% 정도가 지체장애인과 뇌병변 장애인이라고 하니까, 아마 52% 정도는 휠체어나 목발 그 외 보행 보조기구를 이용하는 사람일 거예요. 100명 중에 2명 정도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데 그만큼 휠체어를 많이 보시지 못하셨을 거예요. 대부분의 장애인은 아직도 집 안에만 있거나, 시설에만 있다는 얘기예요. 물론 안 그런 장애인도 있어요. 제가 아는 젊은 장애인 중에도 활동적으로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얼마 전에 제가 아는 휠체어 타는 장애인들 넷이서 발리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기는 해요.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하고 여러 방법을 써서 다녀왔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SNS에 실시간으로 올리는 사진이나 영상 같은 걸 보니까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부럽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람은 다 제각각이잖아요. 비장애인도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들도 있듯이, 장애인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어요. 저는 그 친구들처럼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멀리 나갈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다니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니까.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앞으로 주변 환경을 눈 여겨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 식당은? 이 편의점은? 이 카페는? 이 PC방은? 이 미용실은? 이 클럽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들어오는 게 가능한가? 휠체어 탄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는 이런 시스템이 과연 맞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버스를 탈 때도 휠체어 장애인들은 시간이 좀 많이 걸리죠. 기사님이 내려오셔서 도와주시고 다시 자리도 정리해 주시고 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혹시 그 시간 기다리는 게 짜증 나거나 부당하다고 느끼지는 않으셨는지 한번 생각해 봐 주시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 휠체어 이용자들도 대중교통으로 함께 출퇴근하는 일이 가능해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흔한 말이지만,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 있어요. 사고가 정말 많은 세상이잖아요. 차도 많고요.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 설사 사고를 한 번도 안 당하고 산다고 해도 어떤 사람이든 인생의 한 부분은 장애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노년기는 누구나 다 장애인처럼 지내지 않겠어요. 고령 인구도 많아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지금처럼 이렇게 불편해도 아무 상관 없을까요? 나나 내 부모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래도 상관없을까요? 생각을 많이 해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끝으로 짧게 최근에 저한테 생긴 새로운 일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까 수전동 휠체어로 휠라이를 할 수가 없어서 제가 지하철에서 내릴 수 없었다고 했잖아요. 제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수전동 휠체어를 타고 아파트 밖에서 휠라이 연습을 했어요. 처음에는 바퀴가 전혀 들리지도 않고 어떻게 되지도 않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겨가지고 요만큼 들리던 게 조금씩 더 들리게 됐어요. 그래서 지하철 틈을 넘을 수 있을 만큼은 휠라이를 할 수가 있게 됐어요.

몇 주 전에 병원에 교통약자 이동 지원 차량을 이용해 병원에 갔어요. 진료를 마치고 또다시 집에 가려고 배차를 받으려고 신청했는데, 센터 사정 때문에 7시 이후부터 순차 배차를 해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기사님들이 퇴근도 하셔야 되고, 차량이 밀리기도 했고 등등 말하는데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때가 3시 반이었거든요. 그 시간까지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다른 때 같았으면 엄마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했을 텐데, 그날은 용기가 생기는 거예요. '휠라이 연습을 그동안 했었지, 어쩌면 지하철을 탈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지하철 타기를 해봤어요. 4호선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는 구간도 있는 곳이었어요.

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문과 승강장 사이 틈이 좁았거든요. 내릴 때 되니까 승강장이 더 높고 틈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넓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휠체어 속도를 높여 덜컹 하고 지나갔어요. 두 번 다 성공하니까 '나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자신감이 붙는 거예요. 환승하는 곳으로 가서 1호선을 기다렸다 타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1호선은 좀 오래된 지하철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틈이 더 넓어요. 또 사람들이 막 밀려 타니까 휠라이를 해야 되는데 할 틈이 없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속도를 내서 확 하고 앞으로 갔어요.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 앞바퀴가 끼고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떨어질 뻔했죠. 틈에 끼고 말았어요.

걱정했던 대로 틈에 끼었는데 문 앞에 서 계시던 어떤 남자분이, 정말 그렇게 재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너무나 재빠르게 저를 탁 잡으시면서 휠체어를 또 한 손으로 잡고, 그렇게 덩치가 큰 분도 아니었는데 엄청난 힘으로 저처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을 확 들어서 올려놔 주셨어요. 그렇게 틈에서 꺼내주신 덕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사실 저 혼자 다녀도 또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 많이 착해요. 친절하신 분이 정말 많아요. 그래서 도움을 받는 좋은 경험을 했던 적이 사실은 많아요.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나쁜 경험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하철에 탈 수 있었고, 내릴 때는 사람도 많이 없고 해서 휠라이를 성공했어요. 그래서 집에 무사히 올 수 있었어요. 이제 지하철 혼자 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2년 전 칼럼을 썼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저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됐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것과 상관없이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해결이 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차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통증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돌발 통증이 또 있어요. 심하면 몸을 가누지를 못하거든요. 이게 언제 올지를 몰라요. 운전 중에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세운 적도 있어요. 너무 위험해지잖아요. 그래서 운전하는 게 망설여져요. 지하철 타는 게 그래서 중요하거든요. 또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분들이 아마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문제들 때문에 장애인들이 계속 투쟁을 하고 싸우고 있어요.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좀 넓은 마음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 말씀도 꼭 드리고 싶어요. 불편하시겠지만 그런 일이 있으면 불편하신 일도 물론 많이 있으시겠지만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고요. '장애인들도 나와 똑같이 거리를 걸을 수 있어야 된다', '산책을 할 수 있어야 된다', '나와 똑같이 외출을 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해 주시고. 여러분들이 넓은 마음으로 지켜봐주셨으면 그리고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시운 소설가(=강연),이강준(=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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