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 밑에, 고기불판 위에 받침대…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6. 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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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21] 돈가스 침대도 아니고 그물망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돈가스는 언제나 옳다. 소스에 흠뻑 젖은 경양식 왕돈가스도, 바삭바삭한 일식 돈가스도, 카레와 함께 먹는 돈가스도 모두 옳다. [사진 출처=pixabay]
명사. 1. 돈가스망, 튀김망 2. 고기받침망, 불판받침망 3. 식힘망, 4. 밧드망 5. (일본) とんかつアミ(돈가스아미), 油切り(아부라키리), 油切り網(아부라키리아미·유절망) 6. (북미) 쿨링 랙, 베이킹 랙【예문】“돈가스망 덕분에 마지막까지 바삭하게 먹을 수 있어.” “어리석군. 눅눅해지기 전에 먹어 치우면 된다.”

돈가스망이다. 맞춤법으로는 돈가스망이지만, DNA 레벨에 각인된 우리의 기억은 돈까스망으로 외친다. 실제로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모두 돈까스망으로 표기하고 있다. 예상에서 1도 벗어나지 않는 뻔한 이름이지만, 나라마다 쓰임새마다 이름이 판이해지는 점이 재미있다.
“나도 집에서 잘 차려 먹을 거야.” 야심 차게 돈가스망을 사봤지만, 어느샌가 비누 받침대로 쓰고 있었다. [사진 출처=ITILI]
먼저 돈가스망이라 부르는 상황을 살펴보자. 스테인리스 소재로 만든 금속 망으로 반원 혹은 원형,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든다. 망의 일부가 아래 방향으로 곡절돼 있어 망을 바닥에서 띄우는 다리 역할을 한다. 돈가스나 튀김 요리를 올려 기름을 빼주는 용도로 쓴다. 주방 안에서는 튀김망이라 부르며 그 역할에 충실했지만, 일부 일식 돈가스집에서 작은 튀김망을 아예 접시 위에 올려 손님에게 서빙하기 시작하면서 돈가스망이란 이름을 얻었다. 돈가스망은 기름과 습기로 인해 튀김 옷이 눅눅해지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 하지만 달큰한 소스를 듬뿍 뿌려 먹는 한국식 경양식 돈가스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명칭 아부라키리(油切り) 역시 한국의 튀김망과 동일한 용도다. 여분의 기름(油)을 빼는(切る) 용기를 뜻한다. 튀김 냄비 가장자리에 거는 형태도 있고, 금속 접시 위에 망(油切り網·아부라키리아미)을 올리는 형태도 있다.

주방일을 해봤다면 ‘아 그거’라고 외칠 법한 스테인리스스틸 밧드와 밧드망. [사진 출처=제이큐, SSG.COM]
여기서 파생되는 단어가 바로 정체불명의 밧드망이다. 한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튀김망을 검색하다 보면 밧드망 혹은 바트망이란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밧드(バット)는 vat, 얕은 상자 모양의 그릇을 뜻하는데 요리하거나 사진 현상할 때 쓰는 금속 트레이를 생각하면 된다. 부가가치세(VAT)가 아니다. 금속 접시 위에 망을 올리는 형태의 아부라키리에서 금속 접시가 바로 밧드다. 아부라키리 밧드와 아부라키리 망이 한 세트인 셈인데, 단어가 대한해협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기름빼기’라는 뜻은 사라지고 뜬금없이 밧드와 망이 눈이 맞아버렸다. 로맨스물에서 주인공 커플 대신 조연 커플이 엔딩을 꿰찬 느낌이다. 일본에는 없는 단어지만 배트맨의 일본식 발음 ‘밧토만’과 똑같다.

금속 트레이를 뜻하는 씨팬에서 파생된 씨팬망도 밧드망과 같은 물건이다. 씨팬(C팬)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표현으로, 쿠키 팬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단어로 추정된다. 역시 단어는 줄여야 직성이 풀리는 울라리(울트라리스크)의 민족답다.

일본 돈가스망은 그물 형태가 일반적이다. 사진은 일본 음식점 소개 사이트 타베로그에서 ‘일본 돈가스 1위’를 차지한 도쿄 소재 음식점 돈카츠 나리쿠라(とんかつ成蔵). [사진 출처=돈카츠 나리쿠라]
한국의 일자형 돈가스망과는 달리 일본 돈가스 밑에는 그물 형태의 망이 일반적이다. 덕분에 생긴 이름이 돈가스아미(とんかつアミ)다. 돈가스 군대도 아니고, 돈가스 방탄소년단 팬클럽도 아니다. 아미(アミ)는 그물을 뜻하는 한자 망(網)의 훈독이다. 돈가스망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튀김망과 혼용하는 한국과는 달리 돈가스 전용인 점이 다르다. 음식을 제공하거나 차린다는 의미의 모리츠케(盛付)를 붙여 모리츠케아미(盛付あみ)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 부상하고 있는 이름은 바로 고기받침망, 불판받침망이다. 불판에 올려두고 다 익은 고기가 타지 않도록 올려두는 용도다. 고기 잘 굽기로 소문이 자자한 회식의 마에스트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그새 너무 익거나 타버리는 고기다. 궁여지책으로 불판 위에 상추를, 상추 위에 고기를 올려보지만, 불판의 열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늘만큼이나 마음이 아프다. 아예 개인별 앞 접시 마다 분배하는 방법도 있지만 식사 속도의 차이에 따라 싸늘히 식어가는 고기는 나오기 마련이다. 이제 음지에서 활약하던 돈가스망이 무대 위 양지로 나올 시간이다. 고기의 따뜻함은 유지하면서 태우지는 않는 적당한 거리감이 탁월하다.

이름만 바꾸고 고깃집에 취직한 돈가스망. 이제는 정체를 숨기지도 않는다. [사진 출처=delki]
세 번째는 식힘망이다. 돈가스망은 제과제빵 분야에서도 활약한다. 오븐에서 꺼낸 빵과 쿠키를 판에서 분리해 올려 식히는 용도다. 열기와 습기로부터 분리해 빵 바닥이 눅눅하지 않고 부드럽게, 쿠키는 바삭하게 해준다. 영미권에서의 이름 쿨링 랙(cooling rack)과 뜻이 통한다. 하지만 돈가스망이나 고기받침망이 작은 반원 형태가 많다면 이쪽은 큰 직사각 형태가 많다.

돈가스 음식점에서는 돈가스망, 고깃집에서는 받침망, 빵집에서는 식힘망. 그리고 어디에선가는 밧드망. 분야를 가리지 않고 쓸모를 뽐내는 도구는 다양한 이름으로 대접받는다. 후대에 다른 쓸모가 발견되면 또 다른 이름이 붙지 않을까.

  • 다음 편 예고 : 가방에 돼지코 닮은 마름모 장식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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