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까지 웃음거리였던 ‘이 나라’...이젠 세계적 와인 만들어내는 비결 [전형민의 와인프릭]
미국의 뒤를 이어서는 프랑스(2440만hℓ)와 이탈리아(2180만hℓ), 독일(1910만hℓ)등이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부 신·구세계를 대표하는 주요 와인 생산국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와인 소비량 다섯 번째에 예상외의 국가가 등장합니다. 바로 영국(1280만hℓ)입니다.
영국은 스페인(980만hℓ)과 러시아(860만hℓ), 아르헨티나(780만hℓ), 중국(680만hℓ), 포르투갈(550만hℓ) 등을 앞질러 와인 소비량 5위에 올랐습니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포르투갈은 주요 와인 생산국이고 러시아는 구 소련 당시 우크라이나 등에서 와인을 생산한 경험이 있습니다.중국은 14억명이라는 인구를 감안하면 오히려 적다는 느낌이죠.
혹시 영국산 와인을 보신 적 있나요? 영국은 와인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국가입니다. 포도나무 과실인 포도가 충분히 숙성되는 생장 한계선이 브리튼 섬의 최남단보다 아랫 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죠.
와인 소비량 상위 10개국 중 영국이 5위에 있다는 것은 사뭇 의아한 순위입니다. 생산국도 아닌 나라가 거의 전량을 수입해 소비하면서도, 오히려 생산국들의 소비량을 뛰어넘는 기이한 현상인 셈입니다.
영국이 다양한 시대에 걸쳐 프랑스 본토에 끊임없이 영토를 두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로 와인 생산이 꼽히기도 합니다.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함도 있지만요. 그 유명한 백년전쟁도 영국이 지배하던 가스코뉴 지역(보르도와 그 주변)을 둘러싼 분쟁으로 시작됐습니다.
전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와인 자격증,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도 본원이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습니다. 가장 높은 등급인 MW(Master of Wine)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런던 본원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고 특정 시험들을 치뤄야 합니다.
가장 권위있는 와인 전문 잡지로 꼽히는 디캔터(Decantor)도 영국 국적의 잡지사 입니다. 오죽하면 와인 업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영국이 와인을 못만들자 아쉬워서 만든 게 위스키라는 나옵니다. 와인을 숙성했던 오크통이 없으면 위스키를 만들 수 없으니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자기들한테서 나지 않는 것(와인)에 수백년간 강하게 집착해온 영국인들, 그들이 최근 변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수목 한계선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섬세하고 가벼운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들은 수목 한계선 근방에서, 혹은 고도가 높은 지대에서 잘 자라는데요. 과거 너무 추워서 자라지 못했던 영국 남부에서 섬세한 포도들이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기독교 수도원에서는 성찬식과 순례자 맞이 등을 위해 로마인의 흔적인 와이너리를 유지했죠. 그리고 중세시대의 비교적 따뜻한 시기는 포도가 잘 익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348년께 영국에 퍼져 인구의 3분의 1을 멸절시킨 흑사병이 도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하는 와이너리들이 버티지 못한 채 방치됐습니다.
16세기 중반에는 명맥만 유지하던 와이너리들의 관짝에 아예 못을 박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공회를 내세운 헨리 8세가 가톨릭 수도원들을 강제로 해산하면서 몇 안 되는 와이너리들도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170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 제조에 손을 댔던 개인이 몇 명 있었지만, 영국은 문화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와인 산업은 암흑기에 접어듭니다.
1950년대 중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의 대륙봉쇄령이 실행되자 영국의 상업용 포도 재배에 대한 관심이 불붙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세계적인 수준의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 남쪽 서리(Surrey)와 서식스(Sussex), 켄트(Kent)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들이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의 떼루아와 비슷한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서식스 지역의 다양한 석회암 성질의 토양은 거기서 자란 포도에게 초키(분필·Chalky) 뉘앙스를 부여합니다.
샹파뉴 지역에서 발견되는 그 뉘앙스와 동일한 특성을 가졌고, 샹파뉴는 그 특성을 샴페인에 적극 활용합니다. 여러 전문가들은 서식스가 영국에서 가장 먼저 PDO(원산지 보호) 자격을 부여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켄트 지역은 우리나라에도 익숙한 샴페인 하우스 떼땅저(Taittinger)가 와이너리를 세운 지역이기도 합니다. 전통의 명가인 떼땅저는 2015년께 영국 스파클링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켄트 지역에 포도밭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요한 상징성을 띱니다. 샴페인 생산자 가운데 샴페인 외 지역에서 스파클링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떼루아 만큼 훌륭한 탐이 나는 떼루아를 가진 지역이거나, 자신들의 떼루아가 예컨대 기후 변화 등으로 예전만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근대 샴페인 양조에서 한 획을 그은 포므리(Pommery)는 서리 지역 와이너리와 파트너쉽을 체결했습니다. 자본 뿐만 아니라 양조 노하우까지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계속된다면, 영국 와인이 십수년 뒤 세계 무대에서 각광 받는 와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옵니다. 와인 애호가라면 앞으로 영국 와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있는 주제가 될테죠.
일단 영국의 피즈(Fizz·거품이 쉬익 소리는 내는 것, 와인 산업에서는 통상 스파클링 와인을 뜻함)가 샴페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비슷한 떼루아적 특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해석됩니다. 어쩌면 아직 저렴할 때 미리 맛보는 게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라벨 어딘가 적혀있을 브리티쉬 와인(British wine)과 잉글리쉬 와인(English wine)은 전혀 다른 와인이기 때문에 고를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브리티쉬 와인은 영국 와인 산업이 지금처럼 확대되기 전, 수입 포도 농축액으로 만든 달콤한 포트 와인 혹은 쉐리 스타일의 와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최근 유행하는 영국 스파클링 와인을 맛보시려면 브리티쉬 와인은 왠만하면 피해야 합니다. 이번 주말은 어쩌면 와인의 미래일지도 모르는 영국 와인을 미리 마셔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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