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꽉꽉 포옹해보고 싶소”...꿀 떨어지는 편지화, 국민화가의 반전 매력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6. 8. 17: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중섭, ‘판자집 화실’, 195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건희 기증.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던 한 화가가 있습니다. 생활고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그는 판자집 방 한 칸을 화실로 삼았습니다. 그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사흘에 한 번씩 편지를 정성스럽게 써서 보냈죠. 사랑이 담뿍 담긴 편지에는 재미있는 그림도 곁들였습니다. 아내에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긴 뽀뽀를 보내오’라며 사랑 표현을 아끼지 않았고, 아이들에겐 ‘아빠는 하루 종일 가족들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며 ‘건강하게 기다려달라’고 당부했죠.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꼽히는 이중섭의 이야기입니다.

이중섭은 바다 건너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면서 소, 뛰어노는 아이들, 게, 닭 등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완성합니다. 이번 연재에선 그리운 가족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이중섭의 생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화
1938년 무렵의 이중섭. 분카가쿠인 재학 시절의 사진.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의 문화학교(분카가쿠인) 서양화과에 입학합니다. 이중섭은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데다 운동을 잘하고 노래도 잘 불러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죠. 스물 다섯살의 이중섭은 문화학교 졸업 후 연구생 시절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일제가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통보한 1943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1945년 일본에 있는 마사코를 조선으로 불렀습니다. 마사코는 죽을 고비를 넘어 조선에 와서 이중섭과 결혼식을 올리죠. 이중섭은 아내의 이름을 마사코에서 이남덕으로 바꿨습니다.
1945년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결혼식 모습.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의 강권으로 이중섭은 피난을 떠납니다. 아내와 두 아들, 조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이듬해 제주도로 가죠. 1952년 생활고가 계속되자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빠집니다. 마사코도 건강이 나빠져 결핵으로 각혈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마사코와 두 아이는 일본인 수용소로 들어가고, 몇 달 후 일본으로 떠납니다.
이중섭, ‘현해탄’, 195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건희 기증.
이중섭의 부인과 두 아들이 증기를 내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두 팔을 벌려 가족을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죠. 오늘날의 대한해협을 당시 현해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화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편지화는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예술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이중섭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때 정성을 들였다고 하죠. 그의 친구였던 화가 박고석은 “회신을 할 때의 중섭의 정성은 가관이었다”며 “연애편지라도 쓰는 것처럼 편지를 쓰다가 몇 번씩 찢어버리는가 하면, 꼭 그림을 곁들였다. 봉투를 쓸 때는 굵은 펜으로 글씨를 몇 장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다듬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이중섭은 아내에게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흘에 한 통씩 편지를 보내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중섭,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3-54, 개인소장
‘가족을 그리는 화가’는 이중섭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입니다. 더위를 피하려고 팬티만 입은 채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이중섭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족을 그리고 있네요. 뒤쪽 벽면에는 싸우는 소가 걸려 있고, 오른편에는 닭을 그린 캔버스에 작품 수십 점이 포개져 있습니다. 방바닥에는 편지 봉투가 여기저기 놓여 있는데 받는 사람이 ‘야마모토 마사코’ 또는 두 아들인 ‘태현 태성’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방바닥 가장 아래쪽에 놓인 펜은 그림을 그리는 붓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습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 펜이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셈입니다.

이중섭의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의 자상함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내에게 ‘나의 귀중하고 유일한 천사’ ‘나의 가장 높고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하죠. 또 ‘당신의 멋진 모든 것을 꽉꽉 포옹해보고 싶소. 길고 긴 입맞춤을 하고 싶소’라며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어도 해줄 것이 없던 그는 두 아들이 복숭아를 가지고 놀고 있는 그림을 선물로 보내줍니다. 태성이 “아빠가 다정해서 정말 좋아”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아빠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편지로 전하죠.

이중섭,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195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해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편지 왼편에 그려진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내 마사코는 마치 부처상처럼 보이고 아이들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있네요.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의 발바닥 밑에는 편지 봉투가 쌓여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초승달 아래 네 식구가 어깨동무하듯 둥글게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중섭, 편지
야스나리(태성)군. 호걸 씨, 야스나리군. 건강하게 지내지요? 아빠는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야스나리군은 늘 엄마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군요. 대단히 착한 어린이예요. 아빠는 야스나리군의 상냥한 마음에 감탄했습니다. 앞으로 한 달 지나면 아빠가 도쿄에 가서 자전거 사줄게요. 건강하게 엄마, 야스카타(태현) 형과 사이좋게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아빠’
이중섭,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 ‘길 떠나는 가족’, 1954년경
“나의 야스카타, 잘 지내고 있겠지. 학교 친구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니? 아빠는 잘 지내고 있고 전람회 준비를 하고 있어. 아빠가 오늘…엄마, 야스나리, 야스타카가 소달구지에 타고… 아빠는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에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어. 소 위에 있는 것은 구름이야. 그럼 안녕. 아빠. ㅈㅜㅇㅅㅓㅂ.”

가족과 함께 있고 싶던 이중섭은 가족이 행렬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붉은색 꽃으로 치장한 황금빛 들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첫째 태현이는 꽃을, 둘째 태성이는 비둘기를 들고 있습니다. 마사코는 두 팔을 뻗어 아이들을 붙잡고 있고, 이중섭은 들소를 이끌며 가족들과 함께 낙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이중섭은 원산에서 폭격을 피해 부산까지 내려오고, 또 제주도까지 내려가던 피난길을 그리워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험난한 길이었지만 가족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은 ‘소를 사랑한 화가’로 불리죠. 그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몰두하면 그린 소 그림은 오늘날 한국 근현대 미술 중 걸작으로 꼽힙니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중섭은 소 그리기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중섭은 소와 같이 산다. 소와 입 맞춘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이중섭의 소는 한민족을 상징합니다. 소는 농경사회의 상징적 존재였고, 일제강점기에 황소는 민족의 표상으로 승화됩니다.

이중섭, ‘황소’, 1953-54, 개인소장
소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입니다. 황소가 포효하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소의 외침 소리를 표현하고자 소의 안면과 목 주위를 주름지게 표현했습니다. 서예의 필체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선들이 소의 깊이 팬 주름을 형성하고, 지나온 인고의 세월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커다랗고 순해보이는 눈에선 선한 품성이 나타나죠. 이중섭의 고향인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중섭 개인적 차원에선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죠. 더 넓게는 한민족이 처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중섭, ‘흰 소’, 1955,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흰 소’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띄고 있습니다. 그림 속 소는 공격하면 반격하며 분노를 토할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흰옷을 입는 조선인들은 역경 속에서도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묵묵히 삶을 개척했죠.

표현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유채 물감으로 그렸는데도 마치 동양화 같은 효과가 납니다. 물기 없는 붓으로 문지르듯이 표현한 동양화의 ‘갈필’을 연상시키죠. 이중섭은 이처럼 의도적으로 서양화에 동양의 기운을 담으려 했습니다.

이중섭, ‘소, 비둘기, 게’, 1954, 개인소장
‘소, 비둘기, 게’ 속 소는 곧 죽을 것처럼 말라 가죽만 남아 있습니다. 힘을 다해 쓰러져 일어서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이 소는 이중섭 자신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소는 네 다리를 땅에 구부려 주저앉다시피 했죠. 가랑이 사이에 있는 소의 생식기를 게가 끊어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종이에 묽은 물감을 얇게 칠해 바탕이 마치 소가죽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전체 윤곽선을 연필선으로 구성한 후 연필을 세워서 굵은 선으로 단숨에 내려긋듯이 표현했습니다.
그가 바란 낙원
이중섭의 그림 중에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림이 많습니다. 아이와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많죠. 이상향에 대한 꿈과 희망은 이중섭을 지탱하는 절대적인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1951
탁 트인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열매를 따 모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거나 새를 타고 열매를 따고 있습니다. 새들도 아이들에게 열매를 물어다 주고 있습니다.
이중섭, ‘도원’, 1954
‘도원’에선 벌거벗은 아이들이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놀고 있습니다. 이중섭이 바라는 낙원은 헤어진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겠죠. 이중섭은 이 그림에서 산을 주름지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 등장하는 산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청자 상감 동화 포도 동자 무늬 조롱박 모양 주전자(확대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원’ 속 아이들은 고려청자에 주로 그려진 포도 넝쿨 사이에서 노는 어린이들과 닮았습니다. 이중섭은 화실에 도자기, 불상, 연적 등을 진열해놓고 즐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취향과 관심이 그림에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섭, ‘봄의 어린이’, 1952-1953년, 개인소장
‘봄의 어린이’라는 작품입니다. 벌거벗은 아이들 다섯 명이 제각각의 자세와 표정으로 봄날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비를 잡고, 꽃대를 들고, 나뭇가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배경에는 민들레가 자라고 개미가 기어 다닙니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체가 한데 어울려 뒤섞인 모습입니다. 아이들과 나비, 꽃은 신체적으로 맞닿아 연결돼 있습니다.
분청사기 철화 연꽃 물고기무늬 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봄의 어린이’ 작품 질감이 특이하지 않나요? 마치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처럼 여러 층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이중섭이 일부러 두꺼운 종이 위에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칠한 후, 선을 긋고 긁어냈기 때문입니다. 표면을 완성한 후 그는 연필로 누르듯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섭, ‘바닷가의 아이들’, 1952-1953, 금성문화재단 소장
이같은 표현 기법을 활용해 이중섭은 ‘바닷가의 아이들’에도 물감 덧칠을 반복했습니다. 아래의 물감층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효과가 나죠. 지극히 제한된 색채로 그린 작품입니다.

아이들이 낚싯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낚싯대 같은 도구를 쓰는 아이는 한 명이고, 나머지 아이들은 온몸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표정을 보면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기보다는 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엉키고 한데 어울린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소재가 조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고려청자 속 아이들의 모습이나, 분청사기가 나타내는 질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거죠. 이중섭이 다닌 오산학교의 민족주의적 학풍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오산학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속하던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입니다.

이중섭은 식민지 시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도 자신의 모든 그림에 한글로 서명했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등의 문인들이 학도병 나가기를 권하자 이중섭은 이들을 비꼬아 ‘쑥대머리 까까중’이라고 했다고 하죠. 이중섭은 이쾌대의 권유로 조선신미술가협회에 참여하며 민족적인 화풍을 개발하고 확립해나갔습니다. (이쾌대에 대한 소개는 ‘나를 그린 화가들 1회’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은지화의 탄생
이중섭은 은박지 그림을 통해 독창적인 표현 기법을 창안했습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궁핍한 삶 속 우연히 발견된 장르가 아니라, 재료에 관한 관심과 부단한 실험의 결과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오산학교 시절부터 한지에 먹물을 칠하고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이중섭은 은박지에 못이나 침으로 긁어서 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바른 후 닦아냈습니다. 그러면 긁힌 자국에만 물감 자국이 남습니다. 깊이 팬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완성되는 거죠.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 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과도 유사합니다.

이중섭, ‘두 아이’, 1950년대, 개인소장.
두 아이가 서로 완전히 끌어안아 일체가 된 모습입니다. 단호한 필선과 강렬한 손의 표현이 특징적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이중섭,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 1951-1953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은 이중섭이 제주도 피난 시절 가족과 보낸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핍했던 피난 시절, 이중섭은 게를 잡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는 이중섭과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함께 있습니다.
이중섭,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0년대, MoMA 소장.
여러 명의 인물이 작은 화면에 꽉 들어차게 새겨져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신문을 돌리는 아이가 있고, 대부분의 어른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펼쳐 읽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양담배를 감싸면서 접힌 선의 자국을 그대로 활용해 신문의 끝선이나 인물의 윤곽선으로 활용했습니다. 인물의 이마와 콧등, 볼 등에 유채로 살색을 살짝 더했습니다. 신문 그림에도 흰색이 가볍게 칠해져 복잡한 선적 구성에 질서를 부여했습니다. 이 작품을 포함한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은 현재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쓸쓸한 말년
1953년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러 일본에 갑니다. 하지만 선원 자격으로 입항했기 때문에 일주일 안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중섭은 제대로 된 여권을 마련해서 정식으로 일본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는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개인소장
이중섭이 대구에서 머물던 시절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입니다. 친구인 구상이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선물했네요. 뒤에는 구상의 아내가 남편과 아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른편 마루에 걸터앉은 이중섭은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들 태현과 태성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죠. 친구 가족의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도, 일본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서글퍼하는 것 같습니다.

1955년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으나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했죠. 게다가 당국은 일부 은박지 그림을 외설스럽다며 철거했습니다. 거기다 전시회 때 그림을 사 간 사람들이 그림값을 떼어먹기도 했고, 그나마 들어온 돈은 전시를 도와준 주변 이들을 대접하는 데 써버려 이중섭은 금세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이중섭은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지만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혹평까지 받았습니다. 이중섭은 크게 실망했고, 영양부족으로 인해 신경쇠약 증세를 일으켰습니다. 그를 걱정한 친구들은 그를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이중섭, ‘자화상’, 1955, 개인 소장.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중섭이 그린 자화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미쳤다고 하자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죠. 고된 삶에 이중섭의 얼굴은 홀쭉해졌습니다. 젊은 시절의 환한 미소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전시회가 실패한 후 이중섭은 음식 먹는 것을 거부하고 가족들의 편지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다. 놀면서 공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중섭은 말년에 병원을 전전합니다. 1956년 청량리뇌병원에 입원했다가 담당 의사로부터 정신 이상이 아닌 간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아 퇴원했습니다. 하지만 간염이 심해지면서 그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입원한 지 한 달가량 지난 후 이중섭은 홀로 병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3일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습니다.

1954년 ‘3인전’에서의 이중섭,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유강열 컬렉션, 장정순·신영옥 기증.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이 벌어진 격동의 시기, 이중섭은 자신이 겪은 아픔을 정직하게 그렸습니다. 이중섭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중섭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림으로 웃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를 통해 꿋꿋하고 당당한 한민족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분청사기를 연상시키는 화면 질감이나,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은박지 그림으로 독창적인 표현 세계도 구축했습니다.

이중섭은 작품 활동을 하던 당시 ‘그림에 너무 문학적 요소가 짙다’는 비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 덕분에 이중섭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요. 시인 김광균의 표현처럼, 이중섭은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간 천사’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참고문헌>

-최열(2023), 이중섭, 편지화 : 바다 건너 띄운 꿈, 그가 이룩한 또 하나의 예술, 혜화1117

-국립현대미술관(2022),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미술관(2016), 이중섭, 백년의 신화 : 이중섭 탄생 100주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석태·최혜경(2015), 이중섭의 사랑, 가족, 디자인하우스

-최석태(2000), 이중섭 평전 : 흰 소의 화가, 그 절망과 순수의 자화상, 돌베개

-오광수(2000), 이중섭, 시공사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예술가의 뒷이야기와 대표 작품을 격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