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에 분위기 확 바뀌었다”…경쟁 뒤처졌다는 건 옛말, ‘이 나라’ AI혁신 자신감 [더테크웨이브]
특히 미국 빅테크가 AI 개발을 주도하자 전 세계 주요국들은 ‘AI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어요. AI 주도권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고 해외 기업에 뺏긴다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죠.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AI는 경제·사회·교육·문화·안보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면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이처럼 국가 대항전으로 비화한 AI 경쟁을 빗대 ‘AI 국가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했습니다.
기자가 지난달 작년에 이어 참가한 유럽 최대 스타트업·테크 전시회 ‘비바테크2024’에서는 ‘AI주권’이 유럽의 가장 큰 관심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최국인 프랑스가 미국, 중국 등과의 AI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며 혁신 세일즈 기회로 삼은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작년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AI 경쟁에서 뒤처졌다(lag behind)”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지난해 비바테크에서도 이같은 위기감이 쏟아졌었고요.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프랑스는 반전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챗GPT 쇼크 이후 프랑스 테크업계를 뒤흔들었던 패배감은 “AI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뒤바뀐듯 합니다.
이번주 <더테크웨이브>에서는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던 프랑스가 어떻게 유럽의 ‘AI 테크웨이브’를 이끌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비바테크에 등장해 “프랑스와 유럽연합(EU)은 인공지능(AI) 선도 국가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영국에도 뒤처지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전 세계 주요국이 AI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치열하게 벌이는 가운데 프랑스가 자칫 경쟁 대열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드러냈다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작년 비바테크 현장에서도 “빅테크에 맞설만한 제대로 된 기술기업이 프랑스에 없다”는 한탄까지 흘러나왔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비바테크 개막 하루 전날 엘리제궁에 비바테크 핵심 AI 연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장시간 이들과 회담하며 ‘프랑스를 글로벌 AI 허브로 만들기 위한 비책’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해요.
특히 이 자리는 프랑스의 AI 창업가들과 세계 정보기술(IT) 업계 거물들을 연결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날 참석한 인사들 중 프랑스의 혁신 AI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한 인물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AI리더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나의 자부심이며 비바테크 참석을 위해 발걸음을 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며 “프랑스는 AI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지난 1년간 프랑스는 유럽의 오픈AI로 불리는 미스트랄AI, 구글 딥마인드 출신이 창업해 최근 시드 투자로만 2억 2000만달러를 투자받은 H 등 세계적 수준의 AI스타트업을 배출했습니다.
우선 구글 딥마인드 출신인 아르뛰르 멘슈 미스트랄AI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5월 창업한 미스트랄은 시작부터 유럽의 ‘AI독립’을 추구한 회사입니다.
미스트랄은 남프랑스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바람을 의미한다고 해요. 미국 빅테크가 장악하고 있는 AI 시장에 프랑스의 바람을 불어 넣겠다는 뜻이 담겼지요.
정부 차원의 응원과 격려도 이어졌습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작년 12월 “프랑스가 AI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보다 뒤처졌다”며 AI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모범 사례로 미스트랄 AI를 언급하기도 했죠.
요즘 프랑스 현지에서 미스트랄보다 더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회사도 있습니다. 바로 등장과 동시에 유니콘에 등극한 AI 스타트업 ‘H’ 입니다.
H는 AI에이전트와 라지액션모델(LAM)등을 개발한다는 청사진을 세운 회사입니다. 특히 완전한 범용인공지능(AGI)으로 향하겠다는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죠.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H는 시드 투자로만 2억 2000만 달러를 조달했습니다. 기업가치는 단번에 3억 7000만달러로 평가받았고요.
이는 미스트랄의 시드 투자금 당시 기업가치를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테크크런치 등 미국 매체는 “시드 라운드가 1000만달러를 넘는 경우는 자주 생기지 않는다”며 놀라움을 드러냈죠.
시드 투자는 미국 VC(벤처캐피탈)인 액셀이 이끌었고, 프랑스 억만장자 버나드 아르노, 자비에 니엘과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 유리 밀너 등 유명 개인투자자들이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업으론 아마존, 삼성, 유아이패스 등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빅테크의 프랑스 투자도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아마존은 지난달 초 12억유로 규모로 파리 지역에 새로운 클라우드 컴퓨팅 역량을 구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역시 지난달 프랑스에 40억유로를 투자해 데이터 센터를 짓고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을 밝혔고요.
유럽 내 미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와 견제론을 의식한 듯 아마존, 구글 등 빅테크는 올해 비바테크에서 AI가 유럽에 기여할 수 있는 점에 대해 강조하는 한편 대규모 부스를 꾸려 프랑스 스타트업 지원에 나선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수학·철학 등 기초학문이 탄탄한 교육 체계 △오픈AI·구글 등 빅테크 출신 고급인력들의 귀환 △억만장자와 정부의 지원으로 탄탄하게 구축된 창업 생태계 △마크롱 정권의 강력한 AI이니셔티브와 비바테크 플랫폼의 역할 등을 비결로 꼽았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한 테크기업 창업자는 “AI분야에서 프랑스의 강점은 이론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교육 체제 덕분에 얀 르쿤과 같은 우수한 AI 인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특히 최근엔 국내 스타트업 지원 체계가 크게 개선되고 프랑스 억만장자들이 내수 AI 기업에 투자하면서 생태계가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 국적인 얀 르쿤 교수 세션에는 입장을 위해 1시간 넘게 긴 줄이 늘어섰고, 세션 도중 청중들이 박수 갈채를 보내는 등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우수 인력들이 프랑스로 돌아와 AI기업 창업에 나서고 있는 점도 고무적입니다.
실제로 미스트랄AI는 구글 딥마인드와 메타 연구원 출신이 공동 설립했어요. 또 H의 창업자들은 미국 스탠퍼드대와 구글 딥마인드 등에서 일한 프랑스의 AI 과학자들입니다.
이밖에도 요즘 프랑스에서는 제2의 미스트랄을 꿈꾸며 파리로 돌아와 창업에 나서는 고급 두뇌들이 상당하다는 전언입니다.
비바테크는 프랑스가 테크와 혁신이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로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마크롱 대통령도 거의 매년 참석하는 등 전폭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죠.
비바테크 창립자인 모리스 레비 퍼블리시스그룹 회장은 매일경제와 만나 “(AI개발에서)프랑스는 발을 뗐고, 가속을 시작했다”면서 “인터넷 전환기엔 프랑스가 뒤처졌지만 AI 혁신에서는 빅테크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바테크는 올해 행사에 얀 르쿤 메타AI최고과학자,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등 AI분야 석학들과 주요 정보기술(IT)기업 수뇌부·창업자를 대거 초청했습니다.
프랑스는 국가적 차원에서 ‘AI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비바테크가 이를 위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유로뉴스는 “비바테크가 AI와 관련된 주요 화두를 다루면서 프랑스 혁신가들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정부가 지원은 하되 주도하지 않는다’는 이념 아래 스타트업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발전을 위해 프랑스가 정부 차원에서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글로벌 인재 유치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스타시옹F 개관과 함께 스타트업 창업자와 근로자, 투자자들이 가족과 4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비자 제도인 ‘프렌치테크 비자’를 도입했죠.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창업 생태계를 육성하면서 ‘디지털 주권’을 강조해왔습니다. 이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AI주권’과 일맥상통하죠.
파리 현지에서 만난 여러 정부 관계자와 기업가들이 스타트업 육성 목적에 대해 한목소리로 강조한 것 역시 주권이었습니다.
구글과 아마존, 넷플릭스 등 미국의 대형 IT 기업이 프랑스와 유럽 일상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향후 국제 무대에서 기술 발언권을 갖기 위해서는 프랑스만의 스타트업 발전이 필수라는 시각이 그 배경입니다.
이는 급속한 성장을 추구한 후 기업공개(IPO)나 매각 등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 활동에 초점을 둔 미국 실리콘밸리와의 차별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라 프렌치 테크는 스타시옹F를 업무와 휴식공간 등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모든 생태계를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1000개가 넘는 스타트업과 대기업, 벤처캐피털(VC), 학계, 규제당국이 한 공간에 모여 생활하는 ’스타트업 생활권‘을 만든 셈이죠.
단순한 공간 제공뿐 아니라 창업자들의 멘토링, 교류 프로그램도 활성화됐습니다. 스타시옹F 입주 기업에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글로벌 진출에 필요한 각종 행정 지원과 기술 개발에 필요한 주요 대학과 연구소 연결 등 프랑스 벤처 생태계와의 밀접한 네트워킹이 제공됩니다.
스타시옹F에 입주하기 위해선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통상적으로 경쟁률이 10대1을 훌쩍 넘는다고 해요. 프랑스보다 미국과 영국 국적 기업이 더 많다.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인큐베이팅 파트너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프랑스의 메이저 통신 기업 프리(Free) 창립자인 그는 “프랑스에서 번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며 2017년 사비 2억5000만유로를 털어 스타시옹F를 건설했습니다. 오래된 철도창은 그렇게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육성 시설인 스타시옹F로 탈바꿈했죠.
니엘 회장은 프랑스가 세계 6대 경제국이지만 경직된 교육 시스템 등으로 강대국과의 디지털 경쟁에서 뒤지고 고급 인재 양성에서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스타트업 생태계 육성에 올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쇄 창업가로 성공한 니엘의 학력 역시 고교 중퇴가 전부입니다.
니엘 회장은 스타시옹F 개관 때 “파리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명소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 세계인이 파리에 와서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날을 상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최근 니엘 회장은 프랑스의 AI창업가들을 육성하는 데 여념이 없다고 합니다.
그와의 일문일답을 공유합니다.
-엘리제궁 행사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나요?
=엘리제궁 행사에서의 주요 논의는 프랑스에서의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릭 슈미트 구글 전 CEO는 주요 인공지능 국가로 미국, 중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나 인도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며, 프랑스가 훌륭한 교육 시스템과 인공지능 인재들,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를 위한 핵 에너지 등의 자산을 활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어떤 점을 강조했나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정부가 인공지능의 역사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인공지능을 위한 새로운 자금 조달 및 지원 프로그램을 발표했고요. 마크롱은 또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AI 회사들을 지원해 고객 시장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EU 기관들은 프랑스와 EU AI 회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제품을) 구매할 것입니다.
-AI 분야에서 프랑스의 강점과 자신감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프랑스의 강점은
첫째,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교육 체제 덕분에 많은 우수한 AI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얀 르쿤은 인공지능과 신경망 등에 대한 작업으로 튜링상을 수상했습니다.
둘째, 프랑스의 전기의 75%가 AI를 위한 GPU 팜을 지원하는 데 탁월한 핵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또한 EU가 FAANG과 같은 회사를 보유하지 못하며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유럽의 AI회사가 비유럽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셋째, 프랑스의 스타트업 지원 체계가 크게 개선됐습니다. 이전보다 행정 부담과 세금이 줄어들었고 자본 이득에 대한 30%의 단일 세율이 적용됩니다.
넷째, 이전보다 벤처 자본 투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자비에 니엘과 같은 일부 프랑스 억만장자들은 프랑스 AI 회사들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바일 혁신기 기회를 놓쳤던 이 나라가 AI 혁신기에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산·학·연’이 똘똘 뭉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학계의 인재와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결하는 혁신 엔진이 켜진 것이 강점으로 풀이됩니다.
이처럼 AI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는 프랑스. 하지만 자만심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올해 비바테크 현장에서는 여전히 프랑스가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제언이 이뤄졌습니다. 냉정한 평가도 이어졌죠.
피에르 로우티(Pierre Loutee) 레제코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의 인재들이 유럽에서 AI 기업 개발에 진출해야 한다”면서 “이것은 유럽의 주권 문제와 직결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드리앙 샬티엘 엘도라도 공동창업자는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선 동일한 수준의 기술과 자금조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요. 크리스텔 헤이드만 오랑주 CEO는 “다가오는 AI 트래픽 급증을 유지하기 위해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시급하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우리나라의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AI 레이스(race)’에서 추격자 입장인 한국과 프랑스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자신감’이 필요하지만 ‘자만심’은 넣어두어야 혁신이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AI에 대한 우리의 목표와 철학을 담은 담대한 비전과 전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파편화된 힘을 한데 모아 강력한 ‘AI 드라이브’를 걸어야 승산이 있습니다.
이 기사가 한국 AI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기사를 끝맺겠습니다.
다음번 테크웨이브에서는 프랑스 현지에서 만난 AI혁신가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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