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소년, '롤' 전설이 되다…페이커가 백지수표 거절한 이유

오동현 기자 2024. 6. 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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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명예는 한시적…선한 영향력 주고 싶다"
북미 팀 백지수표, 중국 팀 245억 '러브콜'
2013년부터 T1과 함께 한 프랜차이즈 스타
'살아있는 전설' 페이커 "매시즌 새로운 길 닦겠다"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e스포츠 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전설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로 선정된 '페이커' 이상혁이 6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전설의 전당 미디어데이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2024.06.07. jhope@newsis.com

[서울=뉴시스] 오동현 기자 = "돈이나 명예는 계속 쫓다 보면 더 큰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 인생의 가장 큰 의미가 있는 팬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자 고민하고 실천하려 한다."

평범하고 내성적이던 한 10대 소년이 지금은 전 세계 이스포츠 팬들이 동경하는 '리그오브레전드(LoL·롤)'의 전설이 됐다.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28)의 이야기다.

미국의 ESPN은 페이커를 봉준호, 손흥민, BTS(방탄소년단)와 함께 '한국의 엘리트4'라 칭했고, 중국의 시나닷컴은 김연아를 더해 '한국의 5대 국보'라 평가했을 정도다.

페이커가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지만, 그가 어릴 적엔 가정 형편이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에서 아버지, 남동생,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갔다. 중학생 시절엔 공부도 꽤 잘하는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 진학 후 게임에 전념하기 위해 학업까지 중단했다.

위험 부담이 컸던 도전이었지만,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넉넉하지 않은 사정에도 아들이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컴퓨터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1호 지지자였고, 할머니는 지금도 직접 게임을 하며 손자에게 조언까지 해주는 열성 팬으로 알려졌다.

이는 페이커가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페이커는 지금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이 본받고 싶은 선수로 꼽을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다.

덕분에 페이커는 리그오브레전드 '전설의 전당(Hall of Legends)' 초대 헌액자에 등극했다. 페이커는 지난 6일 국내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도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고, 팬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2013년 18살의 나이로 데뷔한 페이커는 '롤' 이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스포츠와 게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뒤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제 이스포츠는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에 채택될 정도로 전 세계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소년들은 '제2의 페이커'를 목표로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e스포츠 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전설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로 선정된 '페이커' 이상혁이 6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전설의 전당 미디어데이에서 트로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4.06.07. jhope@newsis.com

하지만 한때는 페이커도 돈과 명예를 중요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18살 어린 나이에 받았던 프로게이머 월급 200만 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때, 페이커는 프로게이머로서의 실력을 쌓아갔고, 승승장구할 때마다 명예도 뒤따랐다.

페이커는 "처음 데뷔했을 당시의 원동력은 돈이었다. 월급으로 200만원씩 받아서 너무 좋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돈은 더 이상 페이커의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 페이커는 한 달 소비 비용이 20만원이라고 밝힐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퇴 후 돈을 쓴다면 기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돈이나 명예보단 팬들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팬들을 더 즐겁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또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할 수 있도록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도 제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 특히 게임을 보는 시청자 층이 어리고, 어릴수록 매체의 영향을 받기에 말이나 행동에 조심성을 기하고 있다"며 "저 스스로도 바람직한 가치관을 갖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명상도 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LoL을 통해 삶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됐고,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며 "학창 시절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게이머가 되고 많은 역경을 마주하다 보니,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서 해결해야 하는지 경험하고 배웠다. 게임을 하다 보면 자기 객관화도 많이 된다"고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도 강조했다.

이런 올곧은 심성과 노력 덕분일까.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LoL 이스포츠 최고 권위의 대회인 월드 챔피언십에서 무려 4회나 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 처음 출전한 월드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올랐으며 2015년과 2016년에는 유례 없는 2연속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2023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소환사의 컵을 들어 올리면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자랑했다.

이외에도 이상혁은 국제 대회인 미드시즌 인비테이셔널에서 2016년과 2017년 2회 우승을 차지한 바 있고 한국 지역 프로 리그인 LCK에서도 10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가장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 선수로 남아 있다. 이상혁은 LCK에서 가장 많은 935경기(세트 기준)에 출전, 631승을 기록했으며 3000킬과 5000어시스트를 넘긴 유일한 선수다.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e스포츠 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전설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로 선정된 '페이커' 이상혁이 6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전설의 전당 미디어데이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4.06.07. jhope@newsis.com


그의 기량과 명성을 높게 평가한 해외 팀들의 러브콜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 2020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국 구단에서 페이커에게 100억의 연봉을 제안했고, 북미에서는 백지수표를 제안했다"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MC의 질문에 페이커는 "실제로 계약서를 본 적이 없지만 저도 그랬을 거로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중국 구단의 연봉 245억원 제안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페이커는 프로 데뷔부터 현재까지 10년 넘게 'T1'에서만 활약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2022년에는 T1과 3년 더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계약 조건은 '연봉 50억원+α'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중국 등 해외 팀이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금액엔 못 미치지만, 국내 프로스포츠 선수 통틀어서는 최고 수준의 대우다.

그렇다고 그가 이적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페이커는 "롤 이스포츠 판이 산업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았고, 한 팀에서 오래 뛰는 선수가 많이 없어졌다. 저 역시 이적을 고민하던 순간이 많았는데, T1에서 제시한 여러 가치들이 저와 맞았다. 또 팬들과 가족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LCK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고 밝혔다.

특히 T1에는 페이커의 은사인 '꼬마' 김정균 감독이 합류한 상황이다. 김 감독은 T1에서 2013년 첫 지휘봉을 잡은 이후 페이커와 함께 롤드컵 3회 우승, LCK 10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바 있다. 페이커는 "김 감독님과는 데뷔할 때부터 함께했고 감독님의 행동 하나 하나에 영향을 많이 받고 배웠다. 저에게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던 자양분이 됐다"며 기대감을 전했다.

"이제는 T1의 선수가 아닌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며 "지금까지 함께 해오면서 더 돈독해졌다. 앞으로도 서로 좋은 관계로 많은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팀원들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는데, 정이 많이 들었다. 팀원들과 올해엔 더 많은 업적을 이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페이커는 "매시즌 새로운 길을 닦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전에 이룬 업적들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겠다"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계속해서 길을 모색하고 발전하는 게 작년부터 가진 목표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할 것"이라고 포부를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odong85@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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