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어두움 있기에 더 푸르른 잎사귀 [ESC]

한겨레 2024. 6. 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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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6월의 숲
썩은 낙엽·나뭇가지·미생물 모여
흙 속 생명체 땅 위로 솟아나게
지구의 조화·순환 위한 연결고리
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스소니언 식물 연구소 캠퍼스 인근에 있는 6월의 숲 풍경. 신혜우 제공

‘그게 맞다 생각하다니 정말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떤 이에게 실망한 후에 내 마음속에 계속 맴돌던 생각이다. 형편없는 날들이 지속될 때가 있다. 이번 주가 그랬다. 좋지 않은 일들이 몇 가지 겹치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내내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한 지인에게 실망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은 극에 달했다. 결국 ‘나는 안돼’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늘 화살은 나 자신을 향한다. 이번 주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도 일이 바빠 숲속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쉬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은 더 나빠져만 갔고 나는 결국 숲속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숲속을 걷는 것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겨울에나 보이던 것들이…

숲속 오솔길은 어느새 나뭇잎 터널이 만들어져 있었다. 봄에 난 작은 새싹들은 아주 얇고 가벼운 깃털 같은데여름을 앞둔 6월의 잎사귀들은 넓게 펼쳐지고 도톰해져 나뭇가지를 휘어지게 할 만큼 무거워진다. 나뭇가지에도, 땅 위에도 봄꽃은 지고 초록잎만 무성하다. 잎사귀들은 한층 강해진 햇빛이 반가운 듯 반짝였다. 곧 다가올 여름에 강렬한 햇빛을 맞으며 폭발적으로 일어날 광합성을 준비하는 듯. 숲은 고요하면서도 여름을 맞을 비장함이 느껴진다. 내가 떠올리는 초여름 숲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이맘때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겨울에야 관찰하게 되는 떨어져 썩은 나뭇가지와 낙엽들, 그것과 버무려져 있는 흙과 미생물들이다. 숲의 바닥에 수십~수백년 쌓여온 것들, 숲을 구성하는 중요한 것들이지만 관심받지 못하는 검은 잔해들 말이다. 잎사귀들이 찬란하고 무성한 계절에는 잎에 홀려, 또는 잎에 가려 숲의 바닥에 쌓여있는 검은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은 내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어둡고 음울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있어서이기도 했다. 자연에는 틀린 게 있을까? 나쁨은 있을까? 슬픔은? 그런 답도 없는 생각들로 숲의 어두움을 응시했다.

연구소 건물로 돌아와 다른 실험실에 잠깐 들러 한 박사후연구원을 만났다. 연구소에는 나처럼 다른 나라에서 온 여러 박사후연구원이 있는데 상황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져 자주 얘기를 나눈다. 그는 나와 달리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성격이다. 함께 놀자며 자주 나를 초대했는데 나는 번번이 거절하다가 겨우 한 번 파티에 갔었다. 그는 내가 너무 거절을 많이 한다며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여유롭고 즐기는 삶이 중요하다고 자주 얘기했다. 그런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갑작스레 “그 메일 봤니? 연구소에 아주 슬픈 소식이 있어”라고 얘기했다. 메일에는 간밤에 한 연구원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돌아가신 분과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고 며칠 전에도 만나 인사를 나눴기에 나는 너무 놀랐다. 내게 소식을 알려준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지 잘 생각해야 해. 난 오늘도 즐겁게 살 거야.”

검은 것과 초록잎의 연결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와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와 부정적 감정들이 갑자기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숲 바닥에 켜켜이 쌓여있는 검은 잔해들에 대해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자연에서 맞고 틀린 건 없는 것 같았다. 죽은 식물을 보면 슬프고,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미생물이 내 몸에 나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인간인 내 입장에서의 감정과 판단일 뿐이다. 그래서 슬프고 나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바닥을 이루는 검은 구성원들은 6월의 햇빛에 초록 잎을 반짝이는 살아있는 식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별개의 것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하게 말이다. 미생물들은 식물의 뿌리에, 뿌리의 세포까지 들어가 있다. 동시에 흙 속 잔해와 다른 식물에도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결합과 상호작용은 육상식물의 탄생만큼 오래되었다고 한다. 물속에 있던 식물 조상들이 햇빛을 찾아 땅 위로 나와 육상식물이 되는 과정은 기나긴 역경이었다. 육지에는 햇빛은 많았으나 물속에서 온몸으로 쉽게 얻던 풍부한 물과 영양분은 없었다. 그 큰일을 뿌리가 혼자 해내야 했다. 그것을 도와준 것이 땅속 미생물이다. 화석과 유전적 자료들이 과학적 증거로 보고되고 있다. 최근에는 곰팡이뿐만 아니라 박테리아도 식물과 상호작용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것이라 보고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미생물과 식물의 공생 관계가 식물이 땅 위에 올라온 후 시작되었다’라고 보기보다 ‘땅속 미생물과의 상호작용이 식물이 육지로 나올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었다’라고 여겨진다.

숲속에는 맞거나 틀린 것, 좋고 나쁜 것, 기쁘고 슬픈 것이 없을 거라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생물의 생존방식을 경쟁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경쟁이나 공생도 자연을 설명하기엔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조화, 연결, 순환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자연의 모든 건 조화롭게 연결되어 순환한다. 어떤 것이 더해지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연결고리가 각 개체이며 각 개체가 사는 방법은 그 개체 나름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에게도, 다른 개체들에도, 주변 환경에도 영향을 준다. 돌아가신 연구원을 추모하는 이메일에는 그가 좋아했던 것, 그가 생전에 다른 연구원들과 나누었던 일,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에 대해 적혀있었다. 숲에 사는 다른 생물들과 다를 게 없는, 지구에 살아가는 한 생물인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면 좋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구에서 하나의 연결고리이고 나의 말과 행동, 남겨놓게 되는 모든 것이 나와 내 주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할 사람도, 내 주변을 행복하게 할 사람도 나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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