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端午)는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가 [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6. 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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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의 백년사진 No. 64

● 단오를 즐겼던 시절의 사진

단오(端午). 민족의 명절이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어떤 날인지 사실 잘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모내기를 끝내고 여름을 기다리며 청포물에 머리를 감는 날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6월 10일이 단오입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기사는 따로 없고 간결한 사진 설명만 있는데 단오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꽃밭을 이룬 단오놀이 – 남묘에서/ 1924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2면

고궁처럼 보이는 건물의 기와 처마가 사진 왼쪽으로 보이고 그 옆으로 많은 인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즘 과천 대공원을 가득 채우는 시민들의 행렬 모습 같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주로 성인 여성들이고 그 뒤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여자 아이들도 보입니다. 여성들은 양산을 쓰거나 손에 들고 있기도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따라 나선 중년의 남성들도 보입니다. 중절모를 쓰기도 하고 갓을 쓴 사람도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보여 이곳이 어떤 장소의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이 찍힌 장소는 ‘남묘’입니다. 처음 듣는 곳인데다 요즘에는 사라진 지명 같아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중국의 전설적 장군인 관우의 사당. 신격화된 관우를 관왕,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병된 명(明)의 유격장(遊擊將) 진린(陳寅)은 1597년(선조 30)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가 회복하면서 관우가 자신을 보호했다고 여기고 관왕묘 건립을 시작하였다. 원래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도동1가 9번지였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하였고 1979년에 도동지구 재개발을 진행하면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로23길 278[사당3동 180-1]로 이전하였다. 현재 위치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남산 자락 어딘가에 있었던, 관우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는 것이었네요. 서울 동대문에 남아 있는 동묘와 쌍을 이룬 사당이었다고 합니다.

● 100년 전 단오 풍습에 대한 기사

그러니까 이 사진은 100년 전 명절인 단오를 맞아, 시민들이 서울 용산에 있었다는 ‘남묘’로 나들이 나선 모습을 촬영한 것입니다. 남묘 안에서는 널뛰기 그네뛰기 씨름 등 각종 놀이와 공연이 펼쳐졌을 겁니다. 개별적인 놀이나 공연의 순간보다는 인파를 통해 단오의 규모를 표현하려고 이 사진을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쉬운 마음에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위 사진이 게재되기 하루 전인 1924년 6월 6일자 2면에 그네 타는 사진과 함께 단오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좀 길지만 아래에 소개합니다.

<오늘이 단오(端午)명절
굴원(屈原)이 죽은 날로
여러 가지 놀이 날
파리잡이도 준비>

◇오늘은 단오날이다. 단오란 이름이 어째서 생겼노하니 단오일(端午日)은 단오일(端五日)과 말이 같고 단오일(端五日)은 초오일(初五日)과 뜻이 다르지 않다. 옛글에는 8월 단오일이란 것도 있다. 1년 열두달에 다달이 있는 단오일을 5월이 혼자 차지 한 것은 9일을 9월이 혼자 차지한 것과 비슷하다. 오늘은 옛날 중국 사람 굴원(屈原)이 명나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날이다.

◇그러므로 단오날 굴원의 일이 연상되는 것은 한식날 개자추(介子推)일과 흡사하다. 중국 남방에 성행하던 용(龍)배 놀이는 굴원의 혼을 위로하던 것이라는데 놀이가 끝판이 되면 의례 종(粽)이라고 하는 것을(찰밥을 세모지게 수수잎 같은 것에 싸서 찐 것) 오색 실로 얽어서 물에 던졌었다.

◇이것은 굴원의 혼령이 먹으라는 뜻인데 오색 실로 억는 건 교룡(蛟龍)같은 것이 뺏어 먹지 못하게 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에서 종(粽)과 비파(枇杷)라는 실과(實果) 혹 다른 물품을 서로 주고 받고 한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에서 오늘 쑥으로 호랑이 모양 만든 것을 각신(閣臣)들에게 하사하는 전례가 있었다.

◇ 이것이 애호(艾虎)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날 애호(艾虎)는 문간에 매달면 벽사(闢邪)한다는 중국 풍속에서 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약쑥을 뜯는 습관이 있다. 부채의 절선(節扇)이란 것은 전에 오날 외방관원들이 부채를 진상도 하고 친척(親戚) 지구(知舊)에게 주기도 하였었다. 그럼으로 절선(節扇)이란 말은 즉 단오선(端午扇)이란 말과 같다. 연중 행사에는 본래 미신에서 나온 것이 많지만

◇ 오늘 창포물로 세수하고 창포를 깎아서 머리에 꽂는 것은 벽귀(闢鬼)한다는 미신이다. 또 계집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단오날 그네에 올라앉지 않으면 여름에 더위 먹는다고 참정 말만 한다. 미신이라니 말이지 그 전에 관상감(觀象監)에서 부작(부적)을 써서 궐문에 붙이는 것이 있었다. 그 부적에 쓰던 말은 이러하다. 오월 오일, 천중지절, 상득천복, 하득지복, 치우지신, 동두철액, 적구적설, 사백사병, 일시소멸, 급급여률령

◇ 천중절(天中節)이란 이름은 단오의 별명이다. 오늘은 천기(天氣) 하강(下降)하고 지기상승(地氣上昇)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은 범방(犯房)하면 즉사한다니 젊은 남녀들 조심할 일이다. 이 이야기 끝막기로 우스운 듯 하고 긴요한 것 하나를 적는다.

◇ 뛰는 낙거미를 승호(蠅虎)라고 하는데 오늘 이것을 잡어 터트려서 붉은 팥에 칠해서 음건(陰乾)해 두면 그 팥이 깡창깡창 뛰며 파리를 잡는다고 하니 파리채 대신 만들어 보면 어떠할까?

● 신세대 사진기자들 그리고 사라지는 전통 – 단어는 남아 있지만 풍경은 사라지고 있는 단오 사진

괜히 복잡한 기사를 소개해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시인 굴원이 명라수에 빠져 죽은 날에서 단오가 유래했다는 것과, 용배 놀이, 찰밥을 오색실에 싸서 호수에 던지기, 쑥으로 만든 호랑이, 부채를 선물하는 이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이유, 그네를 꼭 타야 하는 이유, 이날 젊은 남녀들이 조심해야 하는 일, 파리를 쫓는 방법 등 많은 얘기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은 미신이라고 받아들일만한 내용들도 많아 단오가 민속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시대와의 불화라고 할까요. 단오는 신문에서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되어 왔을지 궁금해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DB)에서 지난 사진들을 검색해보았습니다.

1935년 널뛰는 소녀들

1968년 창녕투계팀 시범

1978년 동아방송 단오맞이 민요대잔치

1977년 강릉단오제의 가면무극

1992년 무주택의 날 선포 및 주거연합 창립 3주년 단오한마당

1996년 서울 용산 가족공원에서 단오절 행사로 투계 시범 공연

1998년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펼쳐진 단오축제에 참가한 여성이 그네뛰기

2000년 강릉 단오제에서 그네 타는 여인

2000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숲쟁이 공원’에서 한 부녀자가 그네를 뛰고 있다.

2001년 단오절 맞이 창포물에 머리감기. 국립민속박물관

2002년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그네뛰기(이후에도 창포 머리감기와 그네뛰기 사진이 유사하게 반복)

2024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단오제 홍보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창포머리감기 시연

등이 검색되었습니다. 사진의 양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 100년 간 신문사에서 관심이 별로 없었던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90년대 말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단오는 무척 낯선 명절입니다. 다만 청포로 머리를 감는다던지 그네를 타는 모습은 사진기자를 하면서 몇 번 보았습니다. 사진기자라는 일 중에는 신기하고 특별한 것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특히 2000년대를 지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축제를 많이 기획하고 전통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에서 단오 행사를 많이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도 가끔 단오 관련 사진이 실립니다. 한국 전통을 체험하는 외국인들이 창포에 머리를 감는 모습도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곤 합니다. 하지만 단오의 의미를 상기시키기나 홍보하는 행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의미는 희석되었지만 이미지는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진기자를 하면서 가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와 제 세대들이 경험한 것과는 완전이 다른 뭔가의 사진을 찍을 때 드는 생각입니다. 신기하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을 뉴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찍는 이벤트나 풍경 사진들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아이템일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시골 5일장을 겪어 본 사진기자는 많지 않지만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촬영은 해보게 됩니다.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제가 놀랐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조롱박 사진이었습니다. 선배가 전라북도 고창의 시골 돌담길을 배경으로 3개의 조롱박이 걸려있고 그 앞을 광주리를 인 아낙네가 걸어가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1면에 멋지게 게재되었습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인데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충격이었을까요? 그 사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사라지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는 매체이다 보니 사진기자들이 과거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서 단오를 맞아 나들이 나섰던 인파 사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단오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오 풍경이 신문에서 많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미지도 독자들의 감수성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특별하게 보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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