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고 싶어 ‘수직의 산’을 올랐다 [ESC]

한겨레 2024. 6. 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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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일본 후지산①
3776m 정상까지 10㎞ 트레일
내리막 없이 올라가야만 하는
‘정상 등반’ 궁극의 목표 앞으로
가와구치코 호수에서 바라본 후지산.

일본 야마나시현 가와구치코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무렵이었다. 7년 만에 다시 찾아온 호수는 변함없이 달빛 아래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바람결에 물살이 일렁일 때마다 젖은 강 비린내가 코끝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수풀 사이 보트하우스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는 강태공이 보였다. 호수 곁을 지나가며 잊지 않고 뒤돌아봤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검은 후지산이 보였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거대했다. 그 육중한 자태에 놀랐다. 살다 보면 알면서도 놀라게 되는 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산을 보는 일이다.

7월 초~9월 초 성수기의 후지산

언제 올라도 좋은 곳이 산이고 산은 어느 때나 우리를 받아준다. 이 산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7월 초에서 9월 초에 이르는 두 달간은 후지산 등반 성수기다. 후지산이 가진 여러 풍경 중 가장 많은 인파가 이 산을 오르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 시기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후지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지만 아찔한 설산 등반이 불가피하기에 산행 경험이 노련해야 한다. 또 겨울에는 인근 산장도 모두 폐쇄되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서 산에 오르려면 배낭을 무겁게 짊어져야만 한다.

후지산으로 향하는 문은 해마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열렸을 것이다. 내가 이 산 없이도 잘 지냈던 7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그 문이 어느 날 나에게도 다시 열린 것은 순전히 내 쪽에서 갖게 된 어떤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절박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물론 7년 전 해발 3710m 산정 화구까지 도착했지만 일몰 시각이 임박해 미처 오르지 못한 후지산 정상(3776m)에 대한 철 지난 미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오르지 못한 정상으로 치면 굳이 이 산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때는 지난해 8월, 바야흐로 시즌을 맞은 후지산 일대는 어디를 가도 활기가 넘쳤다. 언어도, 피부색도, 생김새도 모두 다른 이들이 여행 가방을 이고 지고 끌고 밤낮으로 기차역과 버스정류장을 오고 갔다. 오로지 후지산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는 호수 곁에 서서 이 산을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산이 허락한 곳까지 오르다가 무력하게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두 번 다시 오르지 못할 것처럼 기필코 이 산의 정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후지산 중간 지점인 후지 스바루라인 5합목.

후지산 관광버스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버스는 매일 오전 6시30분에서 오후 5시30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끊임없이 후지산 방향으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관광객 대부분은 대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후지산 중간 지점인 후지 스바루라인 5합목까지 이동했다. 이곳은 해발 2304m이니 순식간에 꽤 많이 올라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쉬운 성취라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5합목 이후부터는 이유 불문하고 정상까지 누구라도 걸어서 후지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이후부터 쓰인다. 참고로 합목(合目)은 옛날에 산에 오를 때 불 밝힌 등잔의 기름이 타기 시작해 불이 꺼질 때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한 합목당 거리는 1㎞ 남짓 되니, 등산로 입구에서 10합목인 후지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10㎞ 정도 된다.

후지산에서는 매년 7월이면 일본 산악 마라톤 대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후지산 등산경주(富士山登山競走)’가 열린다. 올해도 일본 각지에서 선수들이 찾아왔고 그 횟수가 무려 76회에 이르니 스포츠 정신을 넘어 한 분야에 대한 이 나라 고유의 장인 정신마저 느껴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회의 ‘코스’였다. 후지산 마을인 후지요시다에서 출발해 요시다 트레일을 달려 9합목(3710m)인 산정 화구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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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에서 비장하게 합장…등반 시작

마을에서 정상까지, 1합목에서 10합목까지, 해발 700m의 후지요시다 시청 앞에서 해발 3776m의 후지산 산정 화구까지 이르는 이 한 편의 멋진 대서사시 같은 길을 이따금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곤 했다. 오르는 산. 오로지 올라야만 하는 산. 오르는 동안 내리막길은 없는 산. ‘수직의 산.’후지산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나의 마음에는 그런 거침없고 호전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산에 대해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하나의 상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하나의 영감이었다. 이를테면 후지산에 오른다면, 한눈에 정상이 어디인지 알 수 있고 내가 앞으로 올라가야 할 길과 이제껏 올라온 길을 직관할 수 있는 후지산에 오른다면 내 삶의 불확실한 어떤 부분들도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나 자신을 어떤 궁극의 목표 앞으로 몰아간다면, 그래서 정상에 오른다면, 언젠가부터 멈춰버린 내 삶의 시간도 움직여줄 것 같았다. 망설이고 주춤하는 동안 잃어버린, 원하고 알면서도 나아가지 못했던 선택 앞에서 이제는 그만 뒤돌아보고 전진하고 싶었다.

후지산의 천년 고찰 후지센겐신사.

그래서 한 번 올라보기로 했다. 1합목으로 이어지는 요시다 트레일 입구로 이동해 후지산의 천년고찰 후지센겐신사(富士浅間神社)에서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합장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이 특별한 산에 오르기까지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생각했다. 갈 길이 먼데 발길은 더디기만 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침이 밝았고 이제 겨우 오전 8시였다.

후지산으로 향하는 길 위로 아주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갔다. 한데 경적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고요한 산이었다. 바로 그때 나무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깜짝 놀라 응시하니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숲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사진작가인 듯했다. 곰이 살고, 야생화가 피고, 지천으로 이름 모를 동물과 식물이 생태계를 이루는 생명의 숲. 그 길 위에서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운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때때로 가쁘게 호흡하며 그 숲의 정적을 깨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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