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게임’ 학폭 묵인해온 사회가 만든 학폭게임

한겨레 2024. 6. 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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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게임’. 티빙 제공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회가 건강하면 학교도 건강하고, 사회가 병들면 학교도 병들 수밖에 없다. 일벌백계의 정책을 제도화해도 학교폭력이 끊이지 않는 건 우리 사회가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학교폭력이 부모의 위세를 등에 업은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이라는 그릇된 인식도 그렇다. 일부 기득권 세력이 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해도 엄벌은커녕, ‘국가 발전, 경제 발전 기여’ 운운하며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풍경이 학교 현장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다. 학교폭력 근절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교는 공동체 의식과 민주시민 의식 함양을 목표로 하는 교육 현장이었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과정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는 그릇된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학교교육 목표가 훼손되었다. 일부 불량 학생들의 일탈이었던 학교폭력은 일부 상위 계층 학생들의 게임으로 포장되기까지 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의 자체 제작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은 “생존력, 리더십, 위에 서는 습관”을 학습하기 위해 특별하게 구성한 교실에서 게임으로 포장한 폭력의 본질을 탐색한다. 19금이라는 시청 등급 경고가 무색하게 10대 청소년은 열광하고, 기성세대는 불편하다.

‘피라미드 게임’. 티빙 제공

‘피라미드 게임’의 설계자 백하린(장다아)은 기품 있고 우아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의 게임”을 강조하며 자발적 참여와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주도한다. 2학년5반 학생들은 백연그룹 회장이자 백연여고 설립자의 손녀 백하린이 주도하는 게임을 거부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게임에 참여하면서도 최하위 등급으로 뽑히지 않기 위해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인다. 게임의 규칙에 따라 최하위 등급으로 뽑히면 한달 동안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견뎌야 한다. 학급 구성원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임이어서 가해자가 없고, 피해자도 피해를 호소하지 못한다. 시험지를 유출하는 담임교사와 명문대 합격을 최고의 교육으로 여기는 학부모들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학교폭력이다.

최상위부터 최하위까지 구분한 등급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2학년 5반 교실은 물질만능주의와 계층 상승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만큼 인간 군상을 속속들이 연습할 곳이 없”다는 할머니의 확증 편향을 내면화한 백하린은 학급 친구들을 상대로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형성된 권력을 학습한다. “정기가 없어 게슴츠레하다”는 의미의 ‘멀텅하다’라는 말로 아들을 훈육하는 할머니도 손녀의 독한 성정을 흡족하게 여긴다. 학교폭력 기사로 게임이 무너질 상황에서 “네가 멀텅하게 굴지만 않으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말로 궁지에 몰린 손녀 백하린을 자극한다.

백하린이 피라미드 최상층부에서 포식자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그의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관자들 대부분은 피해자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학교폭력을 외면했다. ‘피라미드 게임’의 위계질서에 익숙한 학급 친구들을 학년이 바뀌어도 그대로 유지하는 백하린의 전략이 만들어낸 폐해였다. 전학생 성수지(김지연)가 ‘피라미드 게임’을 무너뜨릴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백하린이 만든 질서를 내면화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성수지가 전학 오면서 백하린이 쌓아 올린 피라미드에 균열이 일어났듯이, 피해 유무와 상관없이 폭력이 만들어낸 권력에 예속당하지 않고 저항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성수지의 저항이 백하린의 피라미드를 무너뜨린 것처럼, 아무리 견고한 권력도 구성원의 정당한 분노와 저항을 이길 수 없다.

백연여고 설립자의 확증 편향에서 비롯한 비극적 상황이나 사적 정의 구현의 결말은 함구하는 편이 좋겠다. 교조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극적 반전을 위한 상황 설정을 설명하는 건, 드라마 시청의 재미를 무너뜨리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어서이다. 다만 “버티고 벼려져 나라의 일꾼으로”라는 백연여고 설립자의 교육 이념은 곱씹고 싶다. 국민을 산업화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던 군사정권 시절의 구호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묵인하거나 용인했을 구시대적인 교육 이념이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 학교폭력을 게임으로 포장하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정치적이나 경제적 위세를 누리는 기득권 자녀의 학교폭력 사건은 단순 보도하는 것에 견줘, 연예인의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화력을 집중해 보도하는 언론 현실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이라 하는 이유를 알 듯 모를 듯 하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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