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치 딱 한 잔만…” 잔술 문화 살아있는 그곳으로[동아리]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2024. 6. 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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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2시께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잔술집으로 유명한 ‘부자촌’에서 잔술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한 어르신의 모습. 부자촌은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1960~1970년대 성행하던 ‘잔술(낱잔으로 파는 술)’ 문화가 부활했다. ‘주류를 술잔 등 빈 용기에 나누어 담아 판매하는 경우’를 주류 판매업 면허 취소의 예외 사유로 명시한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다. 그동안에는 소주나 막걸리 등을 잔에 나눠 담아 팔았다가 적발되면 주류 판매 면허가 취소될 수 있었다. 실제 면허 취소로 이어지는 사례는 드물었지만, 이제는 명확한 ‘무죄’가 된 것이다.

법 개정 후 달라진 분위기를 엿보기 위해 지난달 31일 오후 2시께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잔술집으로 유명한 ‘부자촌’을 찾았다. 부자촌은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한 잔 가득 따른 막걸리와 단무지, 강냉이, 전 등 주전부리를 1000원이면 먹을 수 있다. 마침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떠나는 김모 씨(72)를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봤다.

“난 여기서 가끔 막걸리를 낱잔으로 마셔. 편의점에서 한 병을 사서 마시면 싸지만 뭔가 허전해. 여기는 이렇게 잔에 따라주니까 술집 왔다는 느낌도 나고 괜찮아. 젊은 사람들도 종종 와. 근데 젊은이들이 먹긴 좀 너저분해서…. 막상 와도 먹는 사람은 몇 없어.”
부자촌에선 한 잔 가득 따른 막걸리와 단무지, 강냉이, 전 등 주전부리를 1000원이면 먹을 수 있다.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김 씨는 일주일에 1~2번씩 부자촌을 찾는다고 한다. 무료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특히 최근에는 오래된 문화를 경험하려는 젊은이들이 늘어 신기하다면서도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부자촌 이외에도 탑골공원 주변에는 잔술을 판매하는 곳이 몇 군데 더 있었다. 송해길 입구에서 분식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정양임 씨(71)에게 잔술 판매 여부를 묻자 조심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이 근방에서 장사를 시작한지 한 25년 됐어요. 이 자리에서만 17년째에요. 옛날에는 대폿술(큰 그릇으로 마시는 술)을 여기 다 팔았어요. 근데 이젠 팔지 말라고 하니까 노인들이나 와서 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지금도 노인네들이나 와. 그래도 바뀌었다고 젊은 사람들도 가끔 와서 물어보긴 해요. 아주 가끔.”

낯선 구시대 문화… 아직은 부정적 시선

송해길 입구 분식 포장마차에서 분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잔술. 이곳에선 4000원짜리 떡볶이를 안주용으로 2000원어치만 내어주기도 한다. 소주 반 병에 달하는 종이컵 한 컵은 2000원이다.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잔술 문화가 부활했지만 아직은 ‘어르신 전유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날 탑골공원을 2~3시간가량 돌아다니면서 잔술을 찾는 젊은 세대는 보이지 않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무래도 위생이다. 잔술을 판매하는 곳 대부분 오래된 노포이거나 포장마차이기 때문에 위생에 취약한 환경이다.

법 개정에 영향을 받는 잔술이 희석식 소주 또는 막걸리라는 점도 위생 관리에 어려운 부분이다. 두 술은 일반적으로 차게 마신다. 하지만 포장마차의 경우 냉장고 마련이 어려워 주류를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함께 보관한다. 개봉한 술을 보관하기엔 균 번식에 취약한 환경이다. 이밖에도 손님이 남긴 술을 잔술로 팔기 위해 재사용한다는 등 우려점이 있다.

음주 문화가 변했다는 점도 장벽으로 작용한다. 본래 잔술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이른바 ‘점빵’이라고 불리는 구멍가게에 술꾼들이 일하다가 또는 퇴근길에 주기(酒飢)를 간단히 달래기 위해 시작한 문화다. 즉, 말 그대로 ‘술 한 잔’에 집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음주 문화는 안주와 함께 여유 있게 대화하며 즐기는 형태다. 굳이 부실한 안주와 잔술을 마실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잔술 판매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이날 낙원악기상가 인근에 있는 한 국밥집 사장은 “요새 누가 잔술을 먹나. 법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잔술을 찾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여기 오는 사람들은 1병씩 시켜서 먹는데 잔술을 시킬 이유가 없다. 관리하기도 힘들고 잔술을 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송해길 입구에서 분식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정양임 씨(71)도 20년 가까이 영업을 하면서 잔술을 판매하고 있다.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잔술을 판매한다는 포장마차 주인 정양임 씨도 고충을 늘어놓았다. 그는 “술을 팔긴 파는데 매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 한 잔이랑 오뎅(어묵) 국물이랑 그냥 술 조금 드시고 간다”고 말했다. 그는 본래 소주를 종이컵 한 컵 가득 따라 1000원에 팔았다고 한다. 이는 소주 반 병에 가까울 정도로 꽤 많은 양이다. 지금은 물가 상승에 따라 2000원을 받는다. 정 씨는 “2000원을 받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다. 예전 생각해서 1000원어치만 달라고 하는 분이 꽤 있다. 근데 또 절반만 따르면 서운해 하신다. 그래서 7~8부 정도 따라 드린다. 그러다보면 내 입장에서는 더 남는게 없어지는 셈이다”라고 했다.

시민 반응은 어떨까. 잔술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대부분 장기적인 음주 문화로 여기기보단 일회성 경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직장인 이재연 씨(30)는 “잔술이 궁금하긴 하다. 근데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고 위생 얘기도 계속 나와서…. 어차피 술을 마시면 한 잔 이상 마실 텐데 ‘굳이?’라는 생각도 좀 있다”고 했다.

음주 문화 다변화는 긍정적… 핵심은 ‘무알콜’

탑골공원 인근에 위치한 포차 골목.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많은 전문가들도 위생적인 면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음주 문화가 다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번 법 개정은 잔술 판매가 가능해진 희석식 소주나 막걸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현실과 법리간의 괴리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기존 법은 ‘가짜 양주’ 등이 사회적 문제가 되던 때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소비하는 주종이 다양해졌고, 인식 개선도 이뤄지면서 이러한 문제가 많이 해소됐다. 위스키나 사케와 같은 술을 잔술로 판매하는 것이 불법으로 해석될 여지를 없앤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법 개정의 핵심은 잔술보다도 비알코올 또는 무알코올 음료에 있다는 시선도 있다. 개정안에는 종합 주류 도매업자가 주류 제조자 등이 제조‧판매하는 비알코올 또는 무알코올 음료를 주류와 함께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현재는 도수가 1% 이상인 주류만 유통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주류업계 관계자는 “기존에는 무알코올 음료가 가정시장에만 유통되다보니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이번 법 개정을 통해 유흥시장으로 영향력이 확장되면서 성장 동력이 생겼다”며 “특히 건강, 운전, 운동 등 이유로 음주를 꺼렸던 이들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맞추기 위한 대안으로 무알코올 음료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봤다.

윤우열 동아닷컴 기자 cloudanc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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