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고 바르고 뜯는 3단 변주 여름 ‘콘’서트[정연주의 캠핑카에서 아침을]
펠라그라라는 질병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어이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으면 옥수수에 부족한 영양소인 니아신 등이 결핍되면서 펠라그라가 발병하게 되는데, 과거 미국과 유럽에서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식품군을 골고루 먹으니 옥수수를 먹는다고 해서 아플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이렇게 맛있고 완벽한 옥수수인데 이것만 먹으면 위험할 수 있다니, 인생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은 없다. 여차하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았다. 여름이 되면 삼시 세끼 옥수수만 먹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봄이 지나갈 즈음이면 제일 먼저 예약 판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당도 높고 아삭아삭한 초당옥수수, 쫀득하고 고소한 정겨운 맛의 찰옥수수, 달콤하고 말랑말랑 부드러운 노란옥수수. 세상에는 다양한 옥수수가 있고 그 모든 존재를 전부 사랑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주 쉽다.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옥수수다. 옥수수의 달콤한 맛은 수확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밋밋한 전분으로 변화하며 시시각각 당도가 낮아진다.
그래서 옥수수는 주방 창문 바로 앞에 심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물이 끓으면 창문으로 손을 뻗어 옥수수를 따낸 다음 바로 삶아야 한다는 것이다. 옥수수를 유난히 잘 굽던 고모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언제나 물부터 올려놓고 옥수수를 따오는 로망에 빠져 있었다. 보통 2층 이상 높이에 거주하고 있으니까 주방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서 따오려면 옥수수가 덩굴처럼 기어 올라오거나 나무처럼 거대하게 자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캠핑하러 다니는 지금은 생각한다. 옥수수밭을 함께 운영해서 캠핑과 옥수수 수확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면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숯불을 피우는 데는 20~30분이 소요되는데 그사이에 밭에서 직접 따온 옥수수의 껍질을 쓱쓱 벗겨내고 즉석에서 구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일지! 여러 유통 단계를 거쳐 마트에 들어온 전분 상태의 옥수수를 주로 먹는 도시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는 맛이라 무심코 중독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캠핑장을 운영하게 된다면 사업 아이템으로 고려해볼 만한 일이다.
단순한 게 매력…군옥수수
옥수수 껍질을 벗기면서 이렇게 실없는 청사진을 그려볼 정도로 옥수수를 좋아한다. 아직 갓 딴 옥수수를 손에 넣을 방법은 없으니 최대한 캠핑을 떠나는 날짜에 가깝게 도착하도록 수확해서 보내주는 초당옥수수를 한 상자 가져온 참이다. 수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과일처럼 먹는다’는 초당옥수수는 당도가 아주 높다는 이름(超糖)처럼 달콤하고 익혀도 질감이 아삭아삭하다. 일단 맛있는 옥수수를 확보했다면 복잡하게 손을 댈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 풍미와 ‘단짠’을 책임지는 버터와 소금뿐이다.
숯불을 피우는 사이에 옥수수를 손질한다. 껍질을 한두 겹 남겨놓고 익혀야 촉촉해진다는 말도 있지만 거뭇하게 재가 된 껍질을 옥수수에서 털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롭다. 그러니 껍질과 수염은 완전히 벗겨내도록 하자. 차라리 말려서 불쏘시개로 쓰는 것이 낫다. 만약에 조금 모양을 내고 싶다면 껍질을 뜯어내지 말고 아래쪽으로 쭉쭉 뻗도록 뒤집어서 매끈하게 형태를 다듬는다. 그리고 껍질을 한 겹만 뜯어내서 포니테일을 할 때처럼 가운데를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킨다. 그러면 손잡이가 되어서 집게 없이도 껍질 부분을 잡고 옥수수를 돌려가며 구울 수 있고, 뜨거운 옥수수가 식기를 기다릴 정신이 없어도 이 부분을 잡고 먹을 수 있다.
옥수수를 구울 때는 활활 타는 장작불이 아니라 은근하게 타오르는 숯불 위에 올리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기 때문이다. 가스레인지로 치면 중약불 정도의 은근한 불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올려서 까맣게 타는 것이 아니라 노릇한 갈색이 되도록 돌려가며 10~15분 정도 천천히 익혀야 한다. 이때 솔로 버터를 골고루 바르면서 구워야 지방에 숯불 향이 배서 제대로 군옥수수 맛이 난다는 점을 기억하자. 버터를 바르고 소금을 솔솔 뿌려서 완성한 군옥수수만큼 단순하게 단짠의 매력을 보여주는 음식도 없다.
자극의 끝판왕…엘로테
만일 평범한 군옥수수를 자극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만들고 싶다면 엘로테(Elote)를 준비해보자. 엘로테는 멕시코의 길거리 옥수수 간식으로, 더운 나라의 매력적인 음식이 주로 그렇듯이 새콤하고 짭짤하고 매콤하고 달콤하게 미각을 쾅쾅 두드리는 풍미 조합을 선보인다. 크림 베이스에 치즈와 향신료를 더하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데, 사워크림과 마요네즈를 섞은 다음 짭짤한 페타 치즈를 잘게 부숴 넣고 다진 마늘과 다진 고수를 첨가하면 향을 낼 수 있다. 잘 구운 옥수수에 엘로테 소스를 쓱쓱 바른 다음 칠리 파우더나 레드 페퍼 플레이크, 그리고 라임즙을 짜서 뿌리면 짜릿하게 매콤새콤한 맛이 가미된다.
여기서 감귤류의 즙이 입맛을 확 끌어올리기 때문에 이 새콤한 매력은 생략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시판 즙보다 갓 짜서 뿌렸을 때 맛과 향을 훨씬 강력하게 느낄 수 있고,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레몬도 좋지만 신맛이 톡 쏘고 향신료 풍미가 나는 라임이 엘로테 소스에 들어간 재료와 가장 잘 어울린다. 페타 치즈가 없다면 파르메산 치즈 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충분히 짠맛을 내서 옥수수의 농축된 단맛과 대비되도록 하는 것이 엘로테의 포인트라는 점을 기억하자. 달고! 짜고! 매콤하고! 짜릿해야 한다.
옥수수? 갈비?…콘립
캠핑 옥수수의 3단계 변신 중 마지막은 옥수수 갈비, 콘립(corn rib)이다. 여러 해 전부터 틱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콘립은 옥수수를 세로로 4~8등분 해서 익히는 요리다. 튀기거나 구우면 살짝 동그랗게 말리면서 뼈째로 뜯어먹는 갈비 같은 모양이 된다. 먹기도 편하고 보기에도 귀엽다. 보통 교정이 필요 없는 치아처럼 예쁘고 빼곡하게 자라 있는 낟알 사이로는 향신료나 소금간이 잘 배어들기 힘든데, 세로로 썰면 전체적으로 맛이 잘 배어들어서 요리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콘립에는 장점만큼 뚜렷한 단점이 있으니, 밑손질을 할 때 손을 베이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옥수수를 통째로 썰어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옥수수 속대는 굉장히 딱딱하다. 아주 튼튼한 테이블 위에서 옥수수를 잘 고정한 채로 톱니칼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썰어야 한다. 불안하면 일단 가로로 반을 자른 다음에 써는 것이 좋다. 익숙해지면 8등분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안전하게 옥수수를 세로로 써는 데 성공했다면 녹인 버터에 향신료, 다진 마늘 등 원하는 재료를 넣어서 잘 섞은 다음 옥수수 갈비를 넣고 버무린다.
그리고 석쇠에 얹어서 불판에 올린다. 가늘게 썰어서 불판 아래로 빠지기 쉽기 때문에 생선용 석쇠 등 촘촘한 철망에 얹어 불판에 올리는 것이 좋다. 통옥수수보다 익는 시간이 짧다는 것도 콘립의 장점이다. 뒤집어가면서 6~8분 정도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구운 다음에 가루 치즈나 다진 허브, 소금과 향신료를 한 번 더 뿌려서 버무린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캠핑 옥수수의 3단 변신을 마음껏 즐겨보자.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정연주 푸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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