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그곳! 뜻밖에 만난 그 향기 [스프]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선단이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했다. 1년여의 항해 끝에 희망봉을 돌아 새 항로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 뒤 유럽 제국은 신항로를 따라 아시아로 진출했다.
1571년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의 루손 섬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필리핀에 대한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스페인은 대만에 진출코자 했다.
1626년 안토니오 발데스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마닐라를 떠나 대만 지룽(基隆)에 상륙했다. 대포와 총을 앞세워 원주민들을 제압한 뒤 산 살바도르성을 건설했다.
그리고 2년 뒤 단수이(淡水)에 산 도밍고성을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처음 산 살바도르성을 중심으로 살았으나 점차 산 도밍고성으로 옮겨졌다.
그 이유는 단수이강을 이용해서 내륙으로 진출하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력 범위를 신주(新竹)까지 넓혔다. 1629년에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가 대만 남부에 진출했다.
네덜란드인들은 함대를 앞세워 산 도밍고성을 공략했으나 패배하여 돌아갔다. 절치부심했던 네덜란드에게 기회가 왔다. 1636년 필리핀 남부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일어났다.
이에 산 도밍고성의 스페인인들은 주력 부대를 루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로 인해 산 도밍고성의 방위는 허술해졌다. 1642년 네덜란드인들이 급습하자 허무하게 점령당했다.
네덜란드는 현지 수탈식 통치 방식을 취했던 스페인과 달랐다. 단수이를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항으로 활용코자 했다. 또한 산 도밍고성을 증축해서 1646년에 완공했다.
그리고 이름은 안토니 요새로 바꾸었다. 당시 네덜란드와 교역하는 명나라 사람과 대만 원주민은 네덜란드인이 '붉은 털이 많은 사람'이라면서 '홍마오(紅毛)'라고 불렀다.
그에 따라 안토니 요새를 중국어로 '홍마오성(紅毛城)'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홍마오성의 원형도 네덜란드의 안토니 요새다.
1662년 명나라 장군 정성공이 군대를 몰고 대만으로 와서 네덜란드인들을 쫓아냈다. 정성공은 단수이의 전략적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홍마오성을 수리했다.
하지만 1683년 청군이 대만을 대대적으로 공격해오자 정 씨 일파는 청조에 항복했다. 그 뒤 40년 넘게 홍마오성은 버려졌다. 18세기 중국 동남부에서 자연재해가 잇따르자, 수많은 이재민들이 대만 북부로 건너갔다.
청조는 대만의 원주민 및 이주민에 대한 통치 강화와 해안 방어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따라서 1724년 기존의 홍마오성을 수리하여 대만 북부의 통치 거점으로 삼았다.
다만 청 조정에서는 오랫동안 대만 통치를 강화하자는 주장과 사람들을 모두 대륙으로 이주시키고 빈 섬으로 두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따라서 단수이와 홍마오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또 잊혀져 갔다.
홍마오성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860년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1858년에 톈진(天津)에서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2년 뒤 10개의 항구를 개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단수이였다. 영국은 홍마오성에 영사관을 설치했고, 1867년 청조와 협정을 맺어 홍마오성을 영구 조차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이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우호 관계였기에 조차 협정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41년 일본은 영국에 개전을 선포했고 영사관을 폐쇄하고 홍마오성을 접수했다. 전후 국민당은 과거 청조가 맺은 협정을 존중하여 홍마오성을 영국에 반환했다.
비록 영국은 1950년 대만과 단교했으나 영사관은 존속시켜 계속 업무를 보았다. 하지만 1972년에는 영사관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그 뒤 홍마오성은 한동안 호주와 미국이 대신해서 관리하다, 1980년 대만이 영국과 협정을 맺어 돌려받았다.
이렇듯 한 지역을 여러 제국주의 열강이 돌려가면서 점령했던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홍마오성에는 영국영사관과 함께 옛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홍마오성 건물은 네덜란드 양식을 원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었고, 영사관 건물은 영국이 자국 양식으로 개조했다.
오랫동안 제국주의 열강이 지배했던 지역답게 단수이의 홍마오성 주변에는 서구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에 과거 외국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곳을 '옛 거리(老街)'라고 부른다.
옛 거리에서 주목할 유적 대부분은 캐나다의 기독교 선교사이자 생리학자인 조지 레슬리 맥케이(George Leslie Mackay)와 관련 있다.
맥케이 목사는 독실한 장로회 가정에서 태어나 캐나다와 미국의 신학교를 나왔다. 토론토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중국과 대만 선교에 관심을 두어 1년 동안 준비했다.
1872년 3월 단수이에 온 맥케이 목사는 4월에 대만 북부에서 최초로 교회를 세웠다. 이듬해 단수이 주민 5명에게 세례를 주는데, 대만 북부에서 최초의 세례 받은 기독인이었다.
비록 맥케이 목사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생리학과 해부학을 배워서 의술에 조예가 깊었다. 이런 재능은 선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배운 의사가 필요하다가 느꼈고, 캐나다 장로회에 요청해서 1875년 프레이저 의사 부부가 서양 의사로는 최초로 단수이에 왔다. 그 뒤 맥케이 목사의 유산은 단수이 곳곳에 남겨졌다.
특히 1882년에는 대만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옥스퍼드대학을 설립했다. 옥스퍼드대학은 훗날 종합대학으로 성장하고, 1999년에는 이름을 전리(眞理) 대학으로 바꾸었다.
전리대학 옆에는 단장(淡江) 고등학교가 있는데, 맥케이 목사의 아들인 조지 윌리엄 맥케이와 관련 있다. 윌리엄은 단수이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캐나다로 건너가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단수이로 돌아왔다.
그 뒤 대만에서 교육자와 목사로 평생을 보냈다. 1914년 윌리엄이 단수이 최초로 세운 중·고등학교가 단장고등학교다.
단장고등학교는 우리에게 친숙한 무대다. 2007년에 개봉되어 한국에서 대만 영화 사상 가장 많은 흥행 수익을 거두었던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의 촬영지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며 주연까지 맡았던 저우제룬(周杰倫)의 모교가 단장고등학교이다. 영화 속에서는 단장예술고등학교로 지칭했는데, 저우제룬은 음악반을 다녔다.
게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 대부분이 단수이다. 저우제룬은 개봉 시 언론 인터뷰에서 과거 고교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직접 썼다고 밝혔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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