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여당 과반 실패…30년 만에 빛바랜 ‘만델라의 유산’

최혜린 기자 2024. 6. 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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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돌린 민심에 총선 참패…첫 연정 구성 등 정치권 지각변동 예고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 AP연합뉴스

[주간경향]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94년부터 줄곧 집권당 자리를 지켜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독주가 3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지난 5월 29일 치러진 총선에서 ANC는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높은 실업률과 극심한 빈부 격차,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민심이 돌아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처음으로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남아공 정치권에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전망이다.

그간 남아공에서 ANC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민주화의 아버지’인 넬슨 만델라를 배출한 이후 선거 때마다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만델라 정권하에서 인종차별이 무너지는 과정을 몸소 겪은 유권자들은 매번 ANC를 택했다. 인구의 80% 이상이 흑인인 남아공에서 만델라의 정당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은 ANC는 ‘만년 여당’으로 여겨졌다.

올해 총선에선 달랐다. 남아공 선거관리위원회(IEC)는 지난 6월 2일 ANC가 최종 40.18%를 득표해 전체 400석 중 159석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직전 선거인 2019년에 230석을 확보한 것과 비교하면 ‘참패’ 수준이다. 남아공 시민들은 왜 만델라의 유산과도 같은 ANC를 저버린 걸까.

■30년 집권당 ANC ‘예견된 몰락’…왜

ANC의 이번 참패는 사실 예견된 순서였다. 최근 몇 년간 ANC 지지율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20년 전만 해도 득표율이 70%에 달했던 ANC는 5년 전 총선에서 57%를 득표했다. 올해 총선 직전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42~45%에 머물렀다. ANC가 처음으로 과반 득표에 실패할 수 있다는 전망이 쏟아졌다.

세계 최악 수준의 실업률과 빈부 격차, 정치권의 잇따른 부패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올해 1분기 남아공의 실업률은 32.9%를 기록했으며, 15~34세 청년 실업률은 45.5%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빈부 격차도 심각하다. 세계은행(WB)은 남아공을 인구의 10%가 전체 부의 71%를 독점하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과거 백인 정권의 유색인종 차별 정책)’는 여전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여기에 장기 집권 과정에서 ANC 소속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잇따르면서 유권자들의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결국 그동안 ‘대안이 없어서’, ‘만델라 때문에’ ANC를 선택했던 시민들까지 등을 돌린 것이다.

달라진 청년 세대의 인식도 영향을 미쳤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에 태어난 젊은 층은 만델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인식이 적고, ANC의 부패와 무능함에 불만이 크다.

ANC를 향한 민심이 추락한 상황에서 정계에 복귀한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의 등장도 큰 변수였다. 그는 2009년 취임했다가 국정농단이 드러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가 지난해 12월 움콘도 위시즈웨(MK)를 창당해 당대표를 맡았다. MK는 정권 심판론을 내세워 지지층을 끌어모았다. ANC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다른 야당에 표를 주는 것도 망설이던 유권자들을 대거 흡수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 겸 MK 대표 /AFP연합뉴스

■단독 집권 무너진 ANC, 첫 연정 실험 시작

총선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한 ANC는 사상 첫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남아공은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회 400석을 배분하고, 의회 과반의 동의로 대통령을 뽑는다. 지금까지는 ANC가 줄곧 과반 득표에 성공해 이 과정이 수월했지만, 올해는 갖가지 연정 협상이 이어질 전망이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좋든 싫든 국민이 목소리를 냈다. 국민의 선택과 바람을 존중해야 한다”라며 연정 구성을 촉구했다.

ANC는 어느 정당과 손을 잡더라도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ANC가 줄곧 과반 의석을 차지해 온 탓에 야당과 함께 정권을 운영한 경험이 없는 데다, 남아공 정치권은 고질적인 인종 갈등과 빈부 격차로 인해 양극화가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당이 ANC의 연정 상대가 될지 이목이 쏠린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제1야당이었던 민주동맹(DA)이다. DA는 이번 선거에서 21.81%를 득표해 87석을 얻었다. ANC 비판에 가장 앞장서 온 야당이긴 하지만, 자유주의 성향인 라마포사 대통령은 친기업·친시장 성향 DA와의 연정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년 야당’이었던 DA에게도 집권 기회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협상의 문이 열려 있다. 이 경우 두 정당 사이의 긴장을 줄이기 위해 또 다른 군소정당을 연정에 참여시킬 가능성도 있다.

DA의 지지층이 백인이란 것은 큰 걸림돌이다. 과거 인종 차별을 자행한 백인 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DA는 지도부 대부분이 백인 고소득층이다. DA는 ANC의 핵심 정책인 흑인 경제권 강화 등 우대 정책에도 반대한다. ANC가 DA와 연정을 꾸린다면 ‘흑인들의 정당’이라는 정체성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껄끄러운 과거 인연과 손잡을 수도

주마 전 대통령의 MK와 연정을 꾸릴 수도 있다. MK는 창당 6개월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58석(득표율 14.58%)을 확보해 제3당이 됐다.

문제는 주마 대표와 ANC가 갈등의 골이 깊다는 점이다. MK는 ANC와 연정을 꾸리는 조건으로 라마포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다. MK가 그간 ‘ANC 때리기’에만 집중한 탓에 뚜렷한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도 연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돌아선 민심을 달래야 하는 ANC 입장에서도 부패 혐의로 수감됐던 주마 전 대통령과 다시 손을 잡는 것은 부담이다.

MK에 밀려 39석 확보에 그친 기존 제2야당 경제자유전사(EFF)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 EFF는 줄리우스 말레마가 내부 갈등을 겪고 2013년 분리 창당한 급진 좌파 정당으로. 빈부 격차 해결을 위해 토지 재분배와 주요 경제 부문의 국유화 등을 주장한다. ANC가 EFF와 연정을 꾸린다면 복지국가 시스템을 강화하는 등 당의 좌파 성향이 짙어질 수 있다.

다만 EFF도 ANC 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탓에 파벌 문제 등으로 관계가 좋지 않다는 점이 변수다. 게다가 2021년 지방선거 이후 ANC와 EFF가 연정을 시도하다 무산된 경험이 있어 라마포사 대통령을 비롯한 ANC 지도부가 반대할 가능성도 크다.

전문가들은 연정 구성을 예단할 수 없으며 어떤 결과가 나와도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남아공 정치학자 시즈웨 음포푸월시는 “ANC는 삼중고에 빠져 있다”며 “ANC가 누구와 손을 잡든 남아공 정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전 부이센 요하네스버그 비트바테르스란트대 명예교수도 “남아공 정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현지 공영방송 SABC에 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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