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욕하고 때리는데…우리는 누가 보호해주나요"[직장인 완생]

권신혁 기자 2024. 6.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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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콜센터직원·승무원 등 '감정노동자', 폭언·폭행에 노출돼
산업안전보건법 '감정노동자 보호법'상 회사에 조치 요구 가능
고객의 폭행이나 폭언으로 인한 질환, 업무상 재해로 인정 돼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권신혁 기자 = #. 서울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A(26)씨는 불안증과 불면증으로 매일 밤 잠을 설친다. 수면유도제까지 복용해봤으나 잠에 들기는 쉽지 않다. 최근 A씨는 한 환자의 퇴원절차를 돕는 중 환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입원 팔찌'를 제거하던 중 환자가 "왜 이렇게 퇴원하는 데 오래 걸리냐"며 A씨의 가슴팍을 친 것이다. 또 다른 환자는 간병인이 보호자와 싸워 병원을 나가자, A씨는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보호자는 심한 욕설과 함께 "왜 나한테 그러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A씨의 신체 부위를 만지는 환자도 있었다. 하지만 A씨와 동료 간호사들은 이런 이야기를 병원 측에 얘기하지 못한다. 너무 비일비재한 데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A씨는 "우리도 누군가의 딸이고 가족"이라며 "이럴 때 간호사는 누구에게 간호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진상손님'은 모든 업종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문제다. 특히 감정노동자는 이들에게 가장 크게 시달리고 있다. 감정노동이란 감정을 숨기고 억누른 채 회사나 조직의 입장에 따라 말투나 표정 등을 연기하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콜센터 직원, 승무원, 은행창구직원, 간호사, 교사 등이 이에 속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21년 발간한 '감정노동 제도화 현황과 개선과제 검토' 이슈페이퍼에 따르면, 이러한 감정노동자는 국내 취업자 2750만9044명 중 최대 42.2%인 1164만명으로 추정된다. 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감정노동자로 분류되는 근로자의 우울증 유병률은 44.1%였다.

그럼에도 회사 측에서 직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호 조치를 취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고객응대 창구엔 '직원에게 폭언을 하지말라'는 스티커가 붙어있고 전화 시 같은 내용의 음성이 흘러나오지만 A씨의 사례처럼 진상손님은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A씨의 병원에도 간호사들에게 폭언 및 폭행을 하지 말라는 벽보가 곳곳에 붙어있지만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A씨와 같은 근로자들은 진상으로 인한 피해와 관련해 회사 측에 보상 및 대응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현행 법에 따르면, 가능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감정노동자 보호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규정돼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고객의 폭언, 폭행, 그 밖에 적정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같은 법 41조 2항에 따르면 사업주는 업무와 관련해 고객 등 제3자의 폭언등으로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휴게시간 연장 ▲건강장해 관련 치료 및 상담 지원 ▲폭언 등으로 인한 고소, 고발 또는 손해배상 청구 등을 하는 데 필요한 지원이다.

아울러 사업주는 감정노동자들로부터 이 같은 조치를 요구 받을 경우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를 이유로 해고 또는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된다. 사업주가 이를 위반할 시 최대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또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객의 폭행이나 폭언 등으로 정신질환 등 피해를 입었을 때 산재 처리를 요구할 수 있다. 업무로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객의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한 사건 이외에도 업무와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산업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도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있다.

감정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한 판례도 존재한다. 서울고등법원은 2018년 한 콜센터 직원이 스트레스로 뇌출혈 진단을 받자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당시 법원은 콜센터 직원을 감정노동자로 규정했다. 응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특정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되는 업무를 수행했다는 설명이다. 지나친 친절을 강요받고 고객들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등 업무 자체가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줬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A씨가 진상 환자 및 보호자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면, 병원 측에 보상과 적극적 대응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아직까지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회사의 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라고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41조의 조항은 2018년부터 시행됐으나 사업장에서 의미있는 변화를 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갑질119와 아름다운재단이 지난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58.8%가 회사가 제3자의 폭언 등으로부터 노동자를 잘 보호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중 29.2%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권호현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해당 설문 결과를 두고 "그 누구의 월급에도 '욕값'은 들어 있지 않다"며 "회사는 민원인 '갑질'을 당한 직원에게 휴식부여, 상담 및 소송지원 등 법에 따른 보호조치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또 "정부는 회사의 의무 위반 여부를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innovati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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