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의견] 독으로 만드는 약
[미디어오늘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위장·잠입 취재의 유혹에 빠질 때, 점검할 원칙이 있다. 미국 포인터 연구소가 1995년 제시한 '기만 취재 체크리스트'(Deception/Hidden Camera Checklist)다. 취재 시작 전, 다음 항목을 모두 충족하는지 꼭 확인하라고 일렀다. 핵심만 의역한다.
첫째, 중대한 공익에 관한 결정적 정보를 수집할 때만 시도한다. 둘째, 다른 취재 방법을 모두 활용한 뒤 마지막으로 시도한다. 셋째, 기사에서 기만의 이유와 방법을 공개한다. 넷째, 최고 수준의 기사를 위해 뉴스룸의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다섯째, 기만 취재로 막으려는 위해가 기만 취재에 의한 위해보다 훨씬 커야 한다. 여섯째, 이상의 쟁점을 뉴스룸 차원에서 오랫동안 숙의해야 한다.
내 눈에 콕 박히는 대목은 '최고 수준의 기사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는 원칙이다. 어설픈 기사 쓰려고 함부로 기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것은 '중대한 공익에 관한 결정적 정보'라는 대목이다. 기만해도 좋을 만큼 중대한 문제인지 누가 어찌 판단하나.
기자들의 낭만적 기대와 달리, 이 문제는 '내가 보기에 중요하다'는 기자의 예단으로 해결할 수 없다. 기만 취재의 필수 전제인 '고도의 공익성'은 사후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우니 뉴스룸 외부의 학자, 법률가, 독자가 어찌 판단할지 미리 숙고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의 반대 잣대로 검토하는 일이기도 하다. 노력을 아끼려는 취재 편의, 대중을 끌어 돈 벌려는 경제적 이익,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파적 의도는 공익의 반대편에 있다. 이에 입각한 기만 취재는 배척된다.
국내외 사례를 공부하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기만 취재에 평생을 바친 귄터 발라프(Gunter Wallraff)가 있다. 지난 글에 '미디어 전문지 기자가 언론사에 잠입하는 일을 상상해보라'고 적었는데, 귄터가 그렇게 했다. 독일 최대 일간지인 '빌트'에 잠입해 선정 보도 과정을 고발했다. 이후 귄터는 여러 소송에 휘말렸다. 주요 혐의에선 (공익성이 참작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프라이버시 침해 등) 일부 혐의에선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정 밖에서도 일이 났다. 빌트는 탐정을 고용해 귄터의 사생활을 은밀히 캤다. 기만을 고발하려는 기만이 기만의 방법으로 반격당하는 무간지옥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공익적 보도이므로 다 용서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어떤 수준에서건 기자는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귄터가 빌트에 4개월간 위장 취업했다는 점도 살펴야 한다. 고발의 구체성을 높이려면 오랫동안 잠입해야 한다. 그런데 오래 잠입하면 기만의 수준이 높아져 더 강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 이 딜레마를 푸는 것도 기자 몫이다. 그가 1960~70년대 서독에서 주로 활약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서독의 68세대는 권력을 발가벗긴 귄터에 환호했다. 반세기 전의 서독과 오늘의 한국에서 공중의 잣대는 얼마나 같고 다른가. 귄터와 당신의 차이도 돌아봐야 한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그는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정한 저널리즘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용기를 구현할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미국 언론(학)계는 으르대지만 않고 북돋기도 한다. '기만 취재 체크리스트'를 제시한 밥 스틸(Bob Steele)은 어느 연구자와 인터뷰에서 “과거의 나도 기만 취재를 지휘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매우 높은 기준으로 숙고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메딜 저널리즘스쿨은 2012년 '잠입 취재'(Undercover Reporting)라는 단행본까지 발간해, 이를 소개했다.
그러니 용기를 놓지 말라. 한국 저널리즘에는 그것이 필요하다. 다만, 지혜롭고 면밀하게 발휘하라. 독을 씹어 약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라. 세상 구하려는 당신은 결국 독을 삼킬 것이다. 각오했다면, 이 글의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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