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 스파링…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초심 기억하며 [ESC]
실전처럼 기술 써봐야 실력 늘어
이기고 싶은 마음 강해지면 ‘독’
초보자 상대하며 용기·설렘 반추
잊을 수 없는 걸 잊는 것보다 더 확실한 나이 듦의 증거는 없다. 묵은 기억을 폐기해야 신선한 기억을 새로 저장할 수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첫 키스를 잊은 건 충격이었다. 반년쯤 간격을 두고 키스했던 둘을 두고 순서가 헷갈린 거다. 오래된 일기장을 뒤지자니 잊고 싶은 과거와 마주할까 봐 두렵고 그렇다고 직접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보자와 경력자가 만나
그러나 첫 키스를 잊은 기억력으로도 첫 스파링을 기억한다. 상대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초보라서 더욱 그렇다.(보통 스파링이 처음인 사람에겐 지도자가 나서서 노련한 수련자와 짝을 지어준다.) 주짓수 수련자들은 첫 스파링을 수영하는 법도 모르는데 망망대해에 던져진 상황에 빗대곤 하는데 초보끼리의 스파링은 유독 처참했다. 둘이 각자의 스타일대로 허우적거리다가 5분을 다 보냈다. 6인조 꽃미남 아이돌이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라고 노래했듯 첫 스파링은 정말 어렵고 막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보 티를 조금씩 벗었고 이제는 누군가의 첫 스파링을 돕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스파링을 처음 하는 이들은 서툴기도 하지만 낯선 사람과 몸으로 맞붙어야 하는 상황을 혼란스러워한다.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달라’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데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들보다 3~4년 더 수련한 블루벨트라서가 아니라 그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소설 ‘데미안’의 그 유명한 구절처럼 새는 하나의 세계,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고작 연습 스파링일 뿐인데 너무 거창하다고?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스파링은 특수한 경험인 걸 알 수 있다. 평생 스파링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에 열성적인 주짓수 수련자는 스파링 없는 훈련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만큼 주짓수 실력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스파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스파링을 통한 배움은 외국어를 학습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언어의 문법을 익히듯 주짓수 기술을 몸으로 익히는 거다. 그러나 문법을 빠삭하게 안다고 해서 낯선 언어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주짓수도 기술만 많이 안다고 능사가 아니다. 불완전한 문장으로라도 일단 말하기를 자꾸 시도해야 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짓수 기술도 실패하더라도 자꾸 시도해야 몸에 익는다. 잘할 수 있는 문장만 반복하면 언어가 늘지 않듯 주짓수도 할 줄 아는 기술만 시도하면 제자리걸음이다. 못하는 기술도, 아니 못하는 기술일수록 부지런히 시도하고 또 만만찮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주짓수를 더 빨리 익힐 수 있다.
근래 이런 말로 초보자에게 알은체를 하면서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는 나는 얼마나 잘하고 있나? 일반적으로 초보 쪽에서 자신보다 숙련된 사람을 부러워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다. 오히려 나처럼 어중간한 숙련자는 초보를 질투한다. 다시 완벽한 초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훨씬 더 잘 배울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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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맛집’과 블랙리스트
몇 년간 주짓수를 수련하면서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 흡수했다. 순수한 초보와 다르게 무엇에 오염됐나 돌아보면 가장 먼저 이기고 싶은 욕망이 떠오른다. 스파링 도중에 항복을 의미하는 탭을 받아내면 기분 날아갈 것 같고 반대로 탭을 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기고 지는 행위에 따른 희로애락은 인간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본능이다.
그러나 이기기에 너무 집착하기 시작하면 여러 부작용이 따른다. 가장 흔한 부작용은 부상이다. 나보다 수련 기간이 짧거나 체구가 작은 사람에게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고집을 부리는 이는 대개 무리하게 힘을 쓰고 항복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자신은 물론 상대도 다치게 한다. 장기적으로는 성장마저 멈춘다. 주짓수 스파링의 핵심은 탭을 자주 치면서 배우는 것이지, 탭을 치지 않고 우월감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렇게 주짓수 수련자는 이기고 싶다는 말초적인 욕망과 고차원적인 수련 지침 사이를 오간다.
나도 모르게 동료들에게 별점을 매기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스파링하기에 좋은 상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다. 여성 수련자에게 스파링하기 좋은 상대란 가볍고 기술적이고 적당한 완력을 갖춘, 조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스파링 맛집’으로 불리며 신청자가 줄을 선다. 인기 맛집이 있다면 당연히 블랙리스트도 있다. 대체로 힘을 너무 많이 쓰거나 상대를 마치 연습용 더미(스펀지·헝겊 등을 채워서 만든 기술 훈련용 인형)처럼 여기면서 온갖 기술을 무자비하게 시도하는, 존중이 부족한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앞서 나열한 이유가 아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로 스파링을 청하지 않기로 합의된 상대도 있다. 그러니까 그쪽에서도 다가오지 않고 내 쪽에서도 청하지 않는 거다.
바로 이런 점에서 스파링은 미묘하다. 어떤 사람에게 재미있고 안전한 상대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위험한 사람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두 사람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궁합이나 기질의 조화 같은 것이 작용한다. 그러니 많아야 스무 명 안팎이 모이는 수업에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과 스파링해야 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스트레스다. 어느 날은 누구와 스파링을 해도 즐겁고 모두에게 강한 동료애를 느낀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고 모든 게 지겹고 무료하다. 스파링이란 이처럼 개인적인 동시에 상호적이다.
결국 ‘다시 초보가 된다면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하는 무의미한 연구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이미 초보가 아니고 첫 스파링을 반복할 수 없다. 잘못된 경험이 쌓였어도 그 역시 수련의 일부이자 역사다. 대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다른 사람의 처음을 함께하며 나의 처음을 발견할 수는 있다고. 그 속에서 나도 초심자로 거듭난다. 시작하는 자의 고귀한 용기와 설렘을 반추하면서.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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