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륵스키로 빙의한 임윤찬, 피아노로 '전람회의 그림' 완성
멘델스존·차이콥스키 연주에 2천36명 만원 관중 탄성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러시아의 괴짜 작곡가 무소륵스키가 못다 그린 '전람회의 그림'에 점을 찍었다.
임윤찬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1년 6개월 만에 열린 국내 리사이틀(독주회)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공연 2시간 전부터 몰려들어 롯데콘서트홀 2천36석을 채운 만원 관객은 임윤찬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무소륵스키의 그림을 지켜보며 한국 음악사의 새로운 신화 탄생을 예감했다.
피아노로 완성한 11개 '전람회의 그림'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3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연주였다. 열정적인 1·2부 공연을 마치고 20분간 휴식 뒤 무대에 선 임윤찬은 무소륵스키로 빙의한 듯한 연주를 들려줬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가 친구인 러시아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의 유작 11개를 음악으로 묘사한 곡이다. 동맥류로 갑자기 사망한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로, 장중하고 비장한 분위기와 불안하고 서글픈 감성이 묘하게 뒤섞인 작품이다.
아쉽게도 무소륵스키가 묘사한 하르트만의 그림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라 현재는 작품의 명확한 음악적 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당연히 곡을 연주하는 음악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었다.
임윤찬의 이번 공연은 여러 해석을 매조진 음악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했다.
5분의 4박자와 6분의 4박자를 오가는 묘한 리듬감의 간주곡인 '프롬나드'(관객이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감상하는 모습을 묘사한 음악)로 연주를 시작한 임윤찬은 불규칙하고 저돌적인 악상으로 첫 번째 그림 '난쟁이'를 완성했다.
다시 프롬나드로 간주를 메운 뒤 감미롭고 우수 어린 선율로 두 번째 그림 '고성'을 연주했다.
힘찬 느낌의 프롬나드로 템포를 조절한 임윤찬은 밝고 아기자기한 악상으로 3번째 그림 '튈르리 궁전의 공원'을, 저음의 무겁고 규칙적인 반주로 4번째 그림 '비들로'(폴란드식 소달구지)를 완성했다.
이번에는 어두운 악상의 프롬나드로 분위기를 순식간에 뒤바꿨다.
껍질에 덮여있는 병아리의 뒤뚱거리는 걸음을 묘사한 5번째 그림 '껍질을 덜 벗은 햇병아리들의 발레'로 이어지면서 임윤찬의 연주는 절정에 달했다. 과장된 어깨 짓과 바닥에서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과감한 발 구르기를 하는 임윤찬의 모습에선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이후부터는 임윤찬의 신들린 연주가 이어졌다. 6번째 그림 '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무엘레', 7번째 그림 '리모르주의 시장', 8번째 그림 '카타콤'이 한달음에 완성됐다. 애상적인 느낌의 9번째 그림 '죽은 언어로 죽은 이에게 말 걸기'는 곧바로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10번째 그림 '닭발 위의 오두막'으로 변주되고, 찬가조의 위풍당당한 악상으로 마지막 그림 '키예프의 대문'을 마무리했다.
말이 필요 없는 피아노 연주 '무언가'
무소륵스키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공연이었지만, 임윤찬의 연주는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의 노래에서도 빛이 났다.
오랜만에 국내서 독주회를 연 임윤찬이 첫 번째로 선택한 곡은 멘델스존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피아노곡인 '무언가'(無言歌, Lieder ohne Worte)였다.
'말이 없는 노래'라는 뜻의 '무언가'는 멘델스존이 20대 초반부터 작곡한 49개의 곡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전달하겠다는 의도로 작곡한 노래다.
'무언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무언가 마장조'(Op.19-1)와 가장 대중적이지 않은 '무언가 라장조'(Op.85-4)가 연주 목록에 올랐다.
'A→B→A'의 전형적인 이중 구조인 '무언가 마장조'는 섬세한 피아노 기술이 필요한 곡이다. 임윤찬은 특유의 부드러운 조화와 세밀한 변조를 통해 곡 전반에 걸쳐 있는 '꿈결 같은 분위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이어 연주된 '무언가 라장조'는 '무언가 마장조'와는 명확하게 대척점에 선 노래다. 멘델스존 사후 출판된 이 곡은 아직 살얼음이 남아있는 이른 봄을 표현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임윤찬답게 '녹턴'과 같은 섬세한 감정이 느껴지는 연주를 관객에게 선사했다.
임윤찬의 주특기 차이콥스키 '사계'
'형언할 수 없는 노래'로 몸을 푼 임윤찬은 자신의 주특기인 차이콥스키의 '사계'를 쉬지 않고 곧바로 연주했다. '무언가' 2곡과 '사계' 12곡이 연이어 연주되면서 관객들은 14개의 달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모닥불이 피워진 1월의 몽환적인 난롯가는 밝고 경쾌한 2월의 사육제로 순식간에 급변했다.
이어 아네모네꽃이 흐드러진 3∼4월의 들판에서 종달새가 노래하더니, 4분의 2박자의 상쾌한 선율에 5월의 밤이 별빛으로 물들었다.
'사계'의 12곡 중 가장 대중적인 6월의 '뱃노래'와 러시아 특유의 민속적 선율이 두드러진 7월의 '농부의 노래'는 그 어떤 곡들보다 임윤찬다웠다.
8월의 '추수'와 9월의 '사냥'을 지나 무르익은 10월의 가을이 마치 한 편의 연작 시처럼 읊어졌다.
'사계'의 또 다른 대표곡 11월 '트로이카'(삼두마차)에선 섬세한 연주기법에서 벗어난 임윤찬의 호방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초반의 쓸쓸한 정서 표현에 이어 러시아 대륙을 달리는 트로이카의 활기를 캔버스에 직접 그려나가는 듯한 연주였다.
이어 우아하면서도 유쾌한 12월의 '크리스마스' 왈츠로 45분여의 연주가 마무리되자 객석에서 참았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충격과도 같은 감동을 안긴 임윤찬의 리사이틀은 9일 천안예술의전당과 12일 대구콘서트하우스, 15일 통영국제음악당, 17일 부천아트센터, 19일 광주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진다. 이어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로 올해 리사이틀을 마무리한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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