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인 상관에게 아들 소개해 준 엄마···“우리 성공해야 돼”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6. 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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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72] “그 분의 침실에 들어가야 한다. 밤마다 정신 못차리게 만들어야 해.”

그녀는 분에 넘치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권력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비루한 삶을 사는 것이 넌더리가 났던 차. 새로운 왕이 집권했을 때 그녀는 가문을 부흥시킬 기회를 포착합니다. 아름다운 자녀를 왕의 성적 파트너로 바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녀 중 가장 아름다운 아이를 골랐습니다. 바로 ‘조지’였습니다. 웬 남자이름이냐고요. 왕이 동성애를 탐닉한 인물,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아, 왕의 침실에 들어가야한다. ” 미드 ‘메리앤조지’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엄마의 치밀한 계획은 성공합니다. “천사의 미모”를 가진 조지에게 제임스 1세가 푹 빠져버려서였습니다. 16세기 초 잉글랜드의 국정은 모두 조지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입니다. 잉글랜드판 ‘국정농단’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랬던가요. 희망은 반드시 절망을 잉태하기 마련이라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인만큼이나, 성공도 실패의 아버지라고. 역사에도 적용되는 명제였습니다. 성군 엘리자베스1세가 일궈 놓은 잉글랜드의 영광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1세의 성적 방종이 불러 온 나비효과입니다.

천상의 미모 ‘조지 빌리어스’
“저 아름다운 청년은 누군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사냥을 나갔을 때인 1614년이었습니다. 먼 발치에서 한 청년이 수발을 드는 걸 목격합니다. 워낙 하얀 피부에, 빨간색 입술, 매우 탄탄한 근육의 팔 다리. 누가봐도 미남. 제임스 1세의 눈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신하가 귀띔합니다. “이번에 새로 궁에 들어온 조지 빌리어스입니다.” 몇 차례 대화가 오고간 뒤, 제임스 1세의 곁에는 조지가 있었습니다. 제임스가 그에게 푹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남신으로 묘사된 조지 빌리어스.
우연한 사랑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된 만남이었습니다. 조지의 어머니인 메리의 ‘치맛바람’ 덕분입니다. 그녀는 잉글랜드 레스터셔 지방의 별 볼일 없는 귀족집안 빌리어스로 시집을 왔습니다. 타고난 야망가였기에 그녀의 눈은 언제나 수도 런던을 향해 있었습니다.

자식 중 빼어난 미모를 지난 아들 조지를 적극적으로 교육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었지요. 조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 궁정의 예법과 프랑스어, 펜싱을 익혔습니다. 런던의 궁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교양’이었습니다.

“왕의 남친을 잡아야 산다”···잉글랜드 궁정에 분 동성애 바람
궁정 일각에선 빌리어스의 등장을 무척이나 반겼습니다. 제임스 1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로버트 카(男)를 내칠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궁정에서는 ‘미남계’를 활용한 치열한 정치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미남자 조지 빌리어스가 새로운 애인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그를 실제로 본 글로스터 주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극찬했습니다. 제임스의 몸과 마음은 이미 조지의 차지였습니다.

“실연의 아픔이 이토록 클 줄은...”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 조지를 만나기 전 제임스는 그를 동성 연인이자 심복으로 삼았다.
“조지를 내 침실 관리인으로 임명한다.”

조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의 지근거리에서 술을 따르는 ‘로열 컵 베어러’(Royal Cup Bearer·왕실 고위직)로 임명된 뒤에는 왕의 침상을 전담하는 ‘젠틀맨 오브 베드챔버’까지 올랐습니다. 왕의 침실을 들어갈 수 있는 건 어마어마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임스 1세가 조지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조지, 너의 말이 참 달콤하구나.” 미드 ‘메리앤조지’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두 사람의 사랑은 편지에서도 그득히 묻어납니다. 제임스가 조지에게 보낸 서신의 한 대목입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자, ‘아내’인 당신을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길. 예수님에게 요한이 있다면, 나에겐 조지가 있습니다.” 조지도 화답하지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죽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부분을 그 어느때보다 사랑합니다.” 누가봐도 우정을 나누는 내용으로는 안 보입니다.
잉글랜드 국정을 좌지우지한 조지 빌리어스
조지의 커리어가 제임스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고위직에서 끝났다면 다행이었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1세의 조지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1619년, 그를 영국의 제독으로 임명합니다. 국정을 자기의 동성 애인에게 맡긴 셈이었습니다.

조지는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안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직에 자기 사람을 앉혔고, 부와 명예과 관련된 일은 자신이 나서서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요직은 우리 빌리어스 가문이 차지한다.” 미드 ‘메리앤조지’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잉글랜드의 모든 것이 조지의 손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총리직부터, 마부직까지. 잉글랜드의 유명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도 조지에게 줄을 선 덕분에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요(귀납적 방법론으로 과학의 새 장을 연 인물이지만, 정치에서는 꽝이었던 인물입니다. 유명인이 정치할 때는 교차 검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잉글랜드의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들끓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1세가 너무 많은 권력을 조지와 사유화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분열하는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대표되는 ‘스튜어드 왕조’의 권력기반은 조금씩 침하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가 잉글랜드 왕좌에 올랐을 때부터 시민들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처녀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은 뒤부터 사촌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잉글랜드에선 제임스1세)가 왕좌에 앉았지만 그는 잉글랜드와 너무나 맞지 않은 인물이었지요.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에서 나고 자란 제임스 1세는 처음부터 ‘왕권신수설’을 신봉했습니다. 왕은 신이 내린 자리이기에 누구에게도 양보하거나 공유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잉글랜드는 의회 정치로 성장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세금을 부과할 때도 의회의 허락이 필요했을 정도입니다.

“왕의 권력은 신께서 주신 것이니라.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다.” 스코틀랜드 왕에서 잉글랜드 왕까지 오른 제임스1세. 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해 왕의 권력을 제한한 잉글랜드 의회와 자주 대립했다.
제임스 1세의 종교도 문제였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전통에서 자랐습니다(이 때 만든 책이 그 유명한 ‘킹 제임스 성경’. 그의 유일한 ‘치적’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잉글랜드는 반면 성공회를 국교로 믿었지요. 동시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을 신봉합니다.

개신교도, 그것도 장로교 왕이 즉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톨릭 교도들이 화약 테러(Gun powder plot)를 계획한 배경이었습니다(TMI,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이 쓴 가면이 테러 주도자 가이 포크스의 얼굴을 본 따 만든 것이지요).

‘화약 테러’ 용의자 가이 포크스는 오늘날에도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개신교도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청교도(Puritan)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임스 1세의 방종한 궁정생활이 ‘도덕’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청교도들에겐 죄악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반발이 일 때마다 제임스는 강경책으로 시민을 대했지요. 군주를 향한 반감은 불쏘시개처럼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동성 애인의 국정농단이라니.
조지 탄핵에 나선 의회...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조지를 탄핵하라!”

의회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왕이라 하더라도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 ‘마그나 카르타’를 잉태한 잉글랜드의 힘이었습니다. 의회는 조지 탄핵안을 올립니다.

제임스 1세의 반응이 가관이었습니다. 탄핵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그를 버킹엄 공작으로 임명합니다. 공작은 왕 다음가는 ‘작위’.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조지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의회와 시민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지요. 그가 총애하는 신하라는 이유에서요.

“내 과거는 잊어주오.” 보잘 것 없는 귀족에서 버킹엄 공작 자리까지 오른 조지 빌리어스.
조지가 지배하는 잉글랜드는 과거 엘리자베스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궁정의 향락으로 국고는 비어가고 있었고, 시민은 점점 분열해만 갔습니다. 조지는 제임스1세의 아들 찰스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나 결혼을 추진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갑니다. 외교적 결례가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조국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조지 빌리어스의 생명은 길고 질겼습니다. 제임스 1세가 1625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아들 찰스 1세가 즉위합니다. 찰스의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조지 빌리어스, 버킹엄 공작이었습니다. 제임스1세만큼이나 찰스1세도 조지를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새 시대를 염원한 잉글랜드 사람들은 다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지 아저씨만 믿을래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1세의 어린시절 초상화.
계속되는 빌리어스의 실정
“스페인을 공격한다.”

찰스의 시대에도 버킹엄 공작의 실정은 계속됩니다. 잉글랜드 왕실과 스페인 왕실간 혼인이 무산된 걸 계기로, 그는 스페인을 공격하기로 결심합니다. 스페인과 전쟁 승리로 권력을 강화한 엘리자베스1세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지요. 조지는 몰랐습니다.엘리자베스1세와 자신의 그릇 차이를. 스페인은 나약해질대로 나약해진 잉글랜드 함선을 손쉽게 요리합니다. 과거 ‘무적함대’를 무찌른 잉글랜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병가지상사니라.”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조지 빌리어스.
의회로부터 다시 안건이 하나 올라옵니다. ‘조지 빌리어스 탄핵안’. 찰스 1세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탄핵안을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의회까지 해산시켰습니다. 조지는 탄핵안 부결에 고무됐는지, 몇 차례 군사 원정을 더 계획합니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습니다.

대중의 분노는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대중 분노의 압력을 정치로 조절해야 할 의회 민주주의가 찰스1세에 의해 올스톱됐기 때문입니다. 정치로 풀지 못한 압력은 결국 ‘직접행동’으로 표출됩니다. 1628년 8월, 잉글랜드 포츠머스의 한 여관에서 조지가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육군 장교 존 펠튼이 범인이었습니다.

조지가 살해된 장소인 포츠머스의 그레이하운드 여관(Inn). [사진출처=JuneGloom07]
명백한 고위 공직자를 향한 ‘테러’. 대중은 그러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잉글랜드 법원은 존 펠튼을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성에 걸었습니다. 시민들이 이내 모여 “존 펠튼”을 외쳤습니다. 그를 영웅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조지의 죽음...내전이 벌어진 나라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네.”

조지의 죽음은 그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찰스 1세는 그의 암살 소식을 듣고 침실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슬픔에 잠깁니다. 잉글랜드 전체가 조지의 죽음을 기뻐했지만, 찰스 1세만큼은 예외였던 셈입니다. 그는 그만큼이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암군이었습니다.

“왕의 권리는 신성한 것이라고 짐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 찰스 1세. 앤서니 반 다이크의 작품.
조지가 세상을 떠난 뒤, 20년하고도 6개월이 지난 1649년 2월입니다. 스산한 날씨, 사형장에 한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나옵니다. 값비싼 옷이지만, 이미 헤져있는 상태인 걸 보아 그는 과거의 아주 높은 고위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내의 이름은 찰스 1세.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사내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이 소리칩니다. “찰스 1세를 당장 처형하라.”

사형 집행인이 그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군중들은 흥분해 그의 머리가 담겨진 통에 손수건을 담급니다. 왕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기념품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묘사한 네덜란드 그림.
찰스1세는 조지가 죽은 후에도 의회와의 반목을 지속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습니다. 왕당파와 의회파간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수장이 된 의회파는 왕당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의회와 끝까지 불화한 찰스 1세는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제임스1세가 조지를 총애하면서 생긴 나비효과였습니다. 스튜어트 왕조가 한 미남에 의해 절멸 위기까지 몰린 것이었지요. 권력이 사유화 되었을 때, 벌어진 비극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합니다.

“그래 넌 찰스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렸다?” 왕당파 어린이를 심문하는 의회파 인사들. 1878년 윌리엄 프레드릭 예임스의 작품.
<네줄요약>

ㅇ잉글랜드 내전의 시작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ㅇ왕권신수설을 신봉한 그는 동성애적 성향으로 동성 애인인 조지 빌리어스에게 국정을 맡기기도 했다.

ㅇ조지 빌리어스의 실정은 아들 찰스 1세의 치세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는 암살됐다.

ㅇ찰스 1세는 의회와 반목하다가 잉글랜드 군주 중 유일하게 시민에 의해 참수당한 군주로 남았다.

<참고문헌>

ㅇ코스트 데이비드, 버킹엄 공작의 탄핵과 초기 스튜어트 영국의 여론, 영국연구저널 ,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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