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앞에서도 대놓고 뇌물 받더니”…‘서슬 퍼런 칼춤’에 서열 2위도 벌벌 떤다 [신짜오 베트남]

홍장원 기자(noenemy99@mk.co.kr) 2024. 6. 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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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 전경. [사진 제공=연합뉴스]
[신짜오 베트남 - 296] 베트남의 뇌물 관행을 생각하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던 한 주재원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소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던 베트남의 한 고위 공무원 사무실에 들렀다고 합니다. 둘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신변잡기를 나누고 있는데, 공무원의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큰 봉투를 들고 와서 쭈뼛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공무원은 호탕하게 봉투를 건네받고 부하 직원에게 나가라고 손짓했습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50만 동(약 2만 7천 원)짜리 지폐가 수북하게 고무줄로 묶인 여러 다발이었습니다.

한국인 주재원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 공무원은 “우리 사이에 이런 건 봐도 된다”며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이 돈은 사무실 전체 활동비 명목으로 받은 것이며, 직급에 따라 부서원들이 고루 나눠 가진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돈다발을 서랍에 넣고 이야기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벌써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베트남 문화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부패와의 전쟁을 벌였고, 그 여파로 베트남 최고위층 인사 여러 명이 이미 낙마했습니다. 베트남 의전 서열 2위가 2년 만에 두 번이나 바뀌었을 정도이니, 부패를 척결하려는 베트남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신임 주석 또럼. [사진 제공=연합뉴스]
얼마 전에 베트남의 새 주석이 취임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공산당 서기장이 의전 서열 1위, 주석이 2위입니다.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가 3위, 국회의장이 4위입니다. 이번에 새로 주석에 오른 인물은 베트남 ‘부패와의 전쟁’을 주도하던 전 공안부 장관 또럼입니다. 직전 주석인 보반트엉은 지난 3월 전격적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사실 보반트엉은 베트남 내에서 가장 빠르게 출세한 권력의 핵심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정치국원’인지 여부가 서열을 가르는 핵심 요소입니다. 정치국원 이너서클에 들어서면 비로소 고위직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힘을 발휘하는 ‘최고위 공무원’이 됩니다. 보반트엉은 최연소 정치국원 기록을 세운 촉망받는 차기 주자였습니다. 그가 주석 자리에 오른 것은 지난해 3월이었습니다. 이전 주석은 한국에도 친숙한 응우옌쑤언푹 주석이었습니다.

총리 재임 시절 당시 박항서 전 베트남 축구대표팀감독과 기념촬영을 하는 응유옌쑤언푹. [사진 제공=연합뉴스]
의전 서열 3위인 총리를 거쳐 2위 주석에 오른 그는 ‘박항서의 절친’으로 알려져 한국 내 인지도가 높았습니다. 그가 총리와 주석으로 재임하던 시절과 박 전 감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가 정확히 겹쳤기 때문입니다. 특유의 푸근한 몸으로 박 전 감독을 끌어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장면이 카메라에 자주 잡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베트남 권력의 핵심이었던 그 역시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자리를 내놔야 했고, 그 자리를 떠오르는 신예 보반트엉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반트엉 역시 취임 1년 만에 부패 관련 이슈로 커리어가 끝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반부패 정국을 이끄는 전 공안부 장관 출신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취임 직후에도 “베트남 내에서 부패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베트남 언론 등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에서 조사된 부패 관련 사례가 무려 1100여 건에 달합니다. 이를 통해 3000여 명이 수사를 받았으며, 몰수된 자산은 20조 4000억 동(약 1조 1050억 원)에 달합니다. 베트남에서 사정 정국이 펼쳐진 것은 적어도 2~3년 전이니, 조사된 인원과 몰수된 자산은 이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유령 회사를 만들어 무려 304조 동(약 16조 5000억 원)을 횡령한 금융 사기범 쯔엉미란 반틴팟홀딩스 회장이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왜 이렇게 부패와의 전쟁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사실 베트남의 투자 3대 축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입니다. 한국이 일찍부터 베트남에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역시 고속성장 시대를 거치며 ‘법보다 돈이 가까운’ 시절을 최근에 보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특유의 ‘컨트리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도 과거의 한국 관행을 생각하며 과감하게 자금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이제 동북아 3개국을 넘어 미국, 유럽 등 서방의 자금까지 끌어와야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만큼 덩치가 커진 것입니다. 그러나 제도와 규율로 무장한 미국 자금은 애매한 구석이 있으면 베트남까지 잘 넘어오지 않습니다. 회사 내부 컴플라이언스 규정이 까다로워 심사 과정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결국 베트남은 대대적인 부패 척결이 없으면 추가 경제 성장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로 치면 국무총리 격인 의전서열 2위 주석 2명과 국회의장, 장관 여러 명을 단기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부패와의 싸움을 가열차게 벌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칼춤을 추다 보니 최근 베트남 분위기는 ‘복지부동’ 그 자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공직사회에서 바짝 엎드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과연 베트남은 언제까지 사정 정국을 유지할까요. 이번 부패 척결로 인해 국가 신뢰도는 비약적으로 높아질까요. 앞으로의 일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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