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스포츠 스타에서 新무용 선구자로 변신한 조택원
1920년대 중반 정구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던 모양이다. 고교, 전문학교간 대항전은 물론 실업팀간 경쟁이 치열해 선수들이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은행회사 관청측은 정구열이 다른 그 무엇에 비교하여 더욱 노골화하였으니 작년에 관청 대(對) 은행시합이 그로 증명하는 사실이며 그곳으로부터 생겨나온 파동은 금년에 졸업기에 있는 학교선수에게도 미쳐 졸업증서 받기전에 벌써 다 예정된 모양이다. 더욱이 은행은 시내 각 은행단 리그전이 생긴 후로 경쟁이 일층 더 심하여졌다. 작년에 인기 집중된 이 시합은 상은(商銀)이 우승하였으며 김필응군과 조택원군의 전적은 독무대의 감이 없지 않았었다.’(‘바야흐로 싹트는 조선정구계’1, 조선일보 1928년3월15일)
◇1927년 10월 이시이 바쿠 공연보고 무용으로 돌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보성전문에 다니던 조택원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정구 스타였다. 보성전문 재학 중인 1926년 상업은행에 스카우트된 조택원은 1927년 은행 리그전을 석권한 주역이었다. 하지만 1927년 10월 내한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1887~1962) 공연을 보고 180도 방향전환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 때 그의 춤이 바로 내가 꿈꾸던 그러한 춤이었다. 나를 특히 감동시킨 춤이 있었다.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춤이었다. 그날 밤 나는 굳게 마음을 정하였다. 이제 어떠한 사람도, 또 어떠한 사건도 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반신반의로 꿈꾸던 내 인생의 목적이 이제는 확고해졌고 명확해졌다. 내가 나갈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했다.’(조택원, ‘가사호접’ 34쪽)
◇ ‘운동계에선 유감’
일본 신무용 개척자로 이름난 이시이 바쿠는 1926년 3월 경성공회당에서 본격적 현대무용을 선보여 충격을 줬다. 최승희는 이 공연을 보고 이시이 문하에 들어갔다. 조택원은 이시이의 두번째 경성공연을 보고 최승희의 뒤를 이어 도쿄의 이시이 문하로 무용유학을 떠난 것이다. ‘정구선수’ 조택원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가 무용 유학을 떠난 이듬해에도 스포츠계에서 유감이라는 글이 나왔다. ‘금강(구락부)의 명전위로서 작년에는 상은(商銀) 대장으로 은행 리그 전에 우월한 성적을 남겼다. 군(君)이 작년 추기(秋期)에 조선 정구계를 떠나서 일본 무도가 석정(石井)씨의 문제(門弟)가 됨은 사계( 斯界) 일반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바야흐로 싹트는 조선정구계’3, 조선일보 1928년3월17일)
◇해삼위 학생음악단 박세면에게 호팍춤 배워
이시이 바쿠 이전에 조택원에게 무용가의 꿈을 갖게 해준 사건이 또 있다. 1921년 4월~6월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내한공연이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톡) 공연단 일원으로 온 박세면(박시몬)은 플루티스트이자 무용에도 뛰어나 우크라이나 민속춤인 호팍춤(Hopak Dance)을 유행시켰다. 조택원은 공연단이 돌아간 후에도 경성에 머물던 박세면에게 무용을 배웠다.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춤을 배운 것이 바로 이 시몬 박에게서였다. 앞서 말한 코팍이라는 슬라브 풍의 빠른 템포의 춤이었다. 이 빠른 템포의 춤은 내 체질에도, 기질에도 맞았지만 그보다도 테니스로 단련된 내 운동 신경을 가볍게 유쾌하게 흔들어 시원하게 해주는 그러한 신이 나는 춤이었다.’(조택원, ‘가사호접’ 24쪽)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공연은 조택원이라는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를 낳는 데 일종의 ‘나비(효과)’역할을 한 셈이다.
◇토월회 무용극 ‘사람과 죽음’ 출연
해삼위 음악단과 박세면과의 인연은 토월회까지 이어졌다. 일본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는 1924년 1월22일~24일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제3회 공연을 가졌다.
‘토월회 연극부에서는 다시 남녀배우 일동이 제3회 공연을 금 22일밤 7시부터 동 24일까지 삼일간 시내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개연을 한다는데, 각본은 전부 서양것으로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연애극 ‘회색꿈’이라 하며 이번에는 특히 회원 일동의 우량한 관현악합주도 있다는데 입장료는 백권 1원50전, 청권 1원, 홍권 70전이요, 학생석은 50전씩에 할인으로 하게 되었다 하며… 입장권은 금일 낮부터 청년회에서 좌석번호를 정하여 미리 팔겠음으로 미리 사두면 늦게 가도 좋은 자리에 앉을 수있고 연극 중에 춤과 노래가 들기는 이번 ‘사랑과 죽음’이 처음이라더라.’(‘토월회 공연 제3회로 금일부터 3일간’, 조선일보 1924년1월22일)
◇앙코르 요청에 몇번이나 불려나가…
1922년 5월 박승희와 김기진 김복진 형제, 이서구, 박승목, 김을한, 이제창 등 7명이 도쿄에서 만든 토월회는 1,2회 공연을 거치면서 1924년 3회공연을 할 때는 박승희가 주도한 직업극단으로 변신했다. 박승희는 러시아인의 사랑을 그린 무용극 ‘사랑과 죽음’을 선보였는데, 휘문고보생인 열일곱살 조택원이 호팍춤을 추는 무용수로 출연했다. 3회 공연 때는 박세면(플루트)을 주축으로 최호영 홍재유(이상 바이올린)와 러시아 여성 피아니스트가 합주단을 만들어 참여했다. 조택원에게 무용을 가르친 박세면이 조택원의 토월회 출연을 주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택원이 호팍춤을 추고 나면 앙코르를 외치는 관중들의 성화 때문에 연극은 중단되고 몇번이고 다시 불려나가 춤을 췄다고 한다. 조택원은 토월회 연극뿐 아니라 학교 행사나 YMCA 주최 음악회에서도 홍난파, 홍재유(바이올린), 한기주(성악), 김원복(피아노)과 함께 출연, 호팍춤을 췄는데 단연 인기였다고 회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춤에서 가장 일찍, 가장 쉽게 배운 엉터리 춤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이 나던 춤, 그것이 바로 이 코팍(호팍)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승무의 인상’(가사호접)
이시이 문하에서 5년간 수학한 조택원은 1932년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후진양성에 들어갔다. 조택원 무용연구소(처음엔 석정막 무용연구소 조선지부)를 설립, 전통춤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1934년1월27일 경성공회당 첫 귀국공연에 이어 이듬해 1월26일~27일 같은 무대에서 ‘승무(僧舞)의 인상’ 등을 발표했다. 친구인 작곡가 김준영에게 음악을 의뢰, 창작 음악으로 현대 무용을 구성한 첫 사례로 꼽힌다. 신무용의 효시로 거론되는 이 작품은 훗날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명돼 그의 대표작이 됐다.
조택원은 일제 말기 3년여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과 만주, 중국, 몽골 일대를 순회하며 일본군 위문공연을 펼치며 최승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복 후 이 때문에 친일행위자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이다. 1947년 미국에 건너간 이래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에 한국 무용을 알리는 순회공연을 가졌고, 1961년에야 귀국, 정착했다. 이후에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민속무용단 설립자 겸 단장과 예술원회원으로 활약했다. 1930년대~1950년대 1500회 가량 해외 공연을 다니며 한국 무용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21년 조선을 찾은 해삼위 학생 음악단과 박세면이 최승희와 함께 신무용의 쌍벽을 이루는 조택원을 낳은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조택원에게 호팍춤을 가르치고 토월회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던 박세면의 흔적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참고자료
조택원, 가사호접: 창작무용반세기, 서문당, 1973
유민영, 토월회 연국을 풍성케했던 신무용 개척자 조택원, 연극평론 통권 38호, 연극과 인간, 2005, 9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이주희, 일본의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조선에서의 무용활동 고찰, 무용예술학연구 42~3,한국무용예술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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