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주인을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로 교체하게 둘 수 없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끝내 무산된 통일정부 노력
이승만 ‘單政 발언’의 진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공포된 미‧영‧소 3국 외상(外相)의 협정(모스크바협정)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영‧중 4국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남북한 정당‧사회단체의 협의에 의해 구성되는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주한 미군‧소련군 사령부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창설하고, 2주 안에 양측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모스크바협정이 알려진 직후부터 남한에서는 반탁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좌익이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선 이후로는 좌우익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1월 16일, 미소공위 예비회담은 이렇듯 대규모 ‘반탁‧친탁 시위’가 번갈아 벌어지던 어수선한 서울에서 열렸다.
남한이 ‘반탁‧찬탁’으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것과 달리, 김일성을 앞세운 북한의 소련군정은 급속히 안정을 찾아갔다. 1월 5일, 반탁 노선을 견지하던 우익 지도자 조만식이 의장직에서 축출되고 고려호텔에 연금된 직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는 ‘찬탁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2월 8일, 정부 역할을 수행하게 될 김일성 위원장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인민위)가 출범했다. 3월 5일, 인민위는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실제로 북한의 ‘정부’임을 증명해 보였다.
3월 20일, 미소공위 본회의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회했다. 회의를 앞두고 소련은 미소공위를 통해 구성될 임시정부 각부 장관을 남북한 동수로 구성해 ‘북한 2, 남한 좌익 1, 남한 우익 1′로 구성할 전략을 수립했다. 좌우익 기준 ‘3대1′. 소련의 계획대로라면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는 시간문제였다. 소련은 수상 여운형, 부수상 박헌영·김규식, 내무상 김일성 등 내각 명단까지 구성해 두었다.
미소공위에서 소련은 “모스크바협정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 한해 임시정부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인 대부분이 모스크바협정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정부에서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한 달 가까운 공전 끝에 4월 18일, 미소공위는 임시정부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협정에 대한 지지’를 서약하는 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공동성명 제5호’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해석이 엇갈렸다. “서명을 하면 반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소련 측 해석이었고, “반탁을 해도 서명을 하면 미소공위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 해석이었다.
반탁 정국에서 이승만은 김구와 연대해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미군정은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을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임명하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김규식, 국무총리에 김구를 선임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반탁에 집착하지 말고,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삼가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은 한반도의 주인을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로 교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임을 알고 있었다.
미소공위 개최 직후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임한 이승만은 1946년 4월 16일부터 6월 9일까지 충청, 경상, 전라, 한반도 남부 지방의 주요 도시를 순행하며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천안에서 시작된 이승만의 ‘남선순행(南鮮巡行)’은 대전, 김천, 대구, 경주, 울산, 부산, 진주, 하동, 순천, 목포, 광주, 정읍, 전주, 군산 등 26개 도시에서 최소 70만명의 군중을 불러모았다. 대구와 진주 집회에서는 10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했다. 귀국 후 6개월 남짓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남선순행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대중적 인기를 확인하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지역 민중들에게 알렸다.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약간이나마 품고 있었다. 4월 29일, 3만명이 운집한 부산 집회에서 이승만은 소련의 ‘남북 동수(同數) 임시정부 구성안’의 대안으로 ‘인구비례 구성안’을 제기했다. “미소공위를 통해 조선에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는 인구 비례에 따라 북조선 5, 남조선 8, 또는 북조선 3, 남조선 5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생각한 임시정부 북한 대표는 김일성이 아니라 소련군에 연금당한 조만식이었다.
당시 남부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좌익의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좌익이 민심과 동떨어진 ‘찬탁 운동’에 매몰되고, 공산당이 대규모 위조지폐를 제조해 유통시킨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알려져 인심을 크게 잃은 가운데, 이승만이 대규모 군중집회에서 호소력 넘치는 반공 연설을 쏟아내자, 좌익 인사들이 속속 우익으로 넘어왔다. 5월 3일, 진주 집회에서는 좌익 최대 조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이승만 지지를 선언했고, 5월 5일 순천, 5월 8일 목포에서도 이승만의 연설에 감화된 다수의 좌익이 우익으로 전향했다. 5월 6일, 장흥 집회에서는 그해 1월 조선인민당 장흥위원장으로 선출되었던 손순기가 우익으로 전향해 사회를 보았다.
5월 6일, 미소공위는 소련 측이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반탁 인사와 단체의 임시정부 참여를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무기한 휴회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걸었던 일말의 기대마저 접어버렸다. 6월 3일, 한 달 남짓 중지했던 남선순행을 재개한 이승만은 정읍 집회에서 소위 ‘정읍 발언’ 혹은 ‘단정(單政) 발언’이라 알려진 연설을 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해야 할 것이다.”(‘서울신문’, 1946.6.4)
연설문 어디에도 ‘단정’이라는 말은 없었다. 넉 달 전 북한이 사실상 정부인 인민위를 조직했고, 미소공위의 재개 가능성이 요원하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조직해 북한에서 소련을 내쫓고 통일을 도모하자고 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은 “정읍에서 이승만 박사는 3상 결정을 반대함으로써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반소‧반공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남조선 단독 정부를 세우려 하는 것”이라 매도했다. 민전 등 좌익 단체는 “반동 거두 이승만은 조급한 정권욕과 광포한 파쇼 이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시 이러한 폭언을 토한 것이다”라고 공격했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이승만의 신념과 혜안은 좌익에 의해 은근슬쩍 ‘단정 수립’을 획책한 듯 매도되었고, 그때 이승만에게 덧씌워진 ‘분단의 원흉’이라는 프레임은 오늘날까지 답습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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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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