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한 한국에 끌렸어요”… 베트남서 온 그 여대생을 응원한다

강성곤 KBS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2024. 6. 8.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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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강성곤의 뭉근한 관찰]
베트남에서 온 대학생 그녀의 꿈을 응원한다
베트남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1994)에서 주인공 무이를 연기한 쩐 누 옌케

그녀는 예뻤다. 맑고 까만 눈망울에 총기까지 오롯했다. ‘방송 스피치’ 강의 시간. “창가 쪽 긴 머리 학생, ‘베다/배다’의 발음과 뜻을 구분해보세요.” 입 모양을 옆으로 가지런히 하며 [베:다]를, 입을 위아래로 크게 벌려 [배:다]를 정확히 소리 냈다. ‘칼로 자르는 것/베개를 베는 것’은 ‘베다’ ‘아이를 갖다/냄새나 얼룩이 배는 것’은 ‘배다’, 의미도 맞혔다. “놀라운걸. 무슨 과, 몇 학년, 이름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 팜 도 귄안입니다. 베트남 사람이에요.”

경기도 성남시 소재 G대학에 출강 중이다. 학교에 유난히 외국 학생이 많다. 내 수업에도 44명 중 9명. 팜 도 귄안(22·이하 팜)은 팜이 아빠 성(姓), 도가 엄마 성, 귄안이 이름. 작은 꽃이란 뜻이란다. 공강 시간에 구내 카페서 만났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베트남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1994)의 참한 주인공 무이를 빼닮았다. 부잣집 도련님과의 사랑 이야기가 쇼팽 음악과 함께 잔잔히 흐르던 작품. 열대 과일 그린 파파야만큼이나 청신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여기서의 삶이 힘들진 않냐고 물었다. “저는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다 배웠어요. 코로나 탓에 학과목을 거의 원격 수강했지만, 알바를 쉽게 구해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왜 대한민국 유학이었을까? “우선 중국엔 안 좋은 감정이 있어요. 영토 분쟁 때문이에요. 제가 북베트남 하노이 출신이라 더 그런 면도 있어요. 하이난섬(海南島)은 원래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죠. 기후도 그렇고요. 남중국해도 베트남에서는 동해라고 해요. 한국⸱일본 관계와 같아요. 일본을 갈까 생각도 했는데 한국은 가난한 나라에서 성장⸱발전한 점이 끌렸어요. 동네에 한국어 학원 간판이 크게 보인 영향도 있죠(웃음).”

한국은 의료 체계가 너무 좋아 아파도 걱정이 없고, 교통이 편리하고 도로가 깨끗해 너무 좋단다. 거짓말처럼 빠른 택배 배송은 아직도 의문이라고. 반면 서글픈 기억도 있었다. 고깃집에서 2년 넘게 알바를 했고, 함께 일한 한국 언니와도 친해졌다. 주인 아저씨도 타국서 고생한다며 살갑게 대해주셨는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식당 주인에게 ‘뒷담화’를 했다는 게 이유였다. 맹세코 험담이나 비난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오해와 억측이 너무 억울해 믿었던 언니에게 하소연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변명하지 마.” 너무 슬펐단다.

베트남 젊은 여성과 한국인 노총각 사이 국제 결혼에 대해 불편한 감정은 없을까. “아뇨.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선택과 판단의 문제예요. 편견⸱무시⸱연민 같은 게 더 안 좋다고 생각해요.” 우문현답이었다. 이번엔 과거사 얘기. 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대결하던 60~70년대 우리나라는 미국과 동맹이 되어 파병했고, 그 과정에서 베트남인을 살상했다. 이 역사를 알고 있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 여부는? “아빠가 말씀해주셨어요. 태어나기 3년 전인 1975년에 통일이 되었고, 그 전에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고요. 할머니는 82세이신데 한국 사람한테 악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보통의 베트남 사람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베트남에서 온 대학생 팜 도 귄안이 쓴 한글 /강성곤 제공

얼마 전 접한 외신 기사를 떠올렸다. ‘피의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베트남과 프랑스.’ 1954년 5월 베트남 서북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호찌민이 이끌던 베트남 독립군에 의해 궤멸적 참패를 당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식민 통치가 끝나고 베트남은 자주 독립을 이뤘다. 베트남이 지난달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프랑스가 함께하기를 요청했고 프랑스 정부는 국방부⸱보훈부 장관을 보내며 화답한 것. 아픈 역사를 따스한 화해로 거듭나게 만드는 웅숭깊은 힘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사과 지상주의’에다 ‘사과 공화국’이 돼버린 느낌이다. “사과하라. 잘못을 인정하라”고 걸핏하면 허투루 부르댄다. 역지사지의 가치는 민망할 지경. 상대의 미안한 마음을 수용하고 추후의 화평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갈등과 대결 국면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과 요구다. 무언가를 참으면 얕보이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미안하다 섣불리 말하면 요령 없는 맹한 사람으로 치부된다. 한국인의 성정이 본디 이렇게 성마르고 강퍅하고 까탈스럽던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팜에게 졸업 후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사가 되거나 삼성⸱현대 등 대기업에 취업하면 환영받을 거라 조언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사업할 겁니다. K뷰티는 확실히 경쟁력이 있어요. 화장품이 너무 좋아요. 또 하나, 반지⸱귀고리⸱목걸이가 정말 이뻐요. K주얼리쯤 되려나요? 공장을 짓거나 무역을 해서 둘 중 하나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남한산성 밑 토종닭집에서 먹은 능이버섯백숙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었다는 팜, 그녀의 당찬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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