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 민족사학 개척한 임정 대통령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⑤ 백암(白巖) 박은식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10세 때부터 7년간 서당에서 공부했고, 17세에 고향을 떠나 두루 다니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이때 이웃 안악군에 사는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도 교분을 쌓았는데 이 두 사람은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 불렸다. 결혼 후 평안도, 경기도, 서울 등지에서 성리학과 실학을 수학했고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27세에 향시에 특선으로 뽑혔지만 30세부터 6년간 동명왕릉 참봉 등으로 일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다. 이후 동학농민혁명, 갑오개혁, 을미사변, 대한제국출범 등 격변의 시대를 맞으면서 40세를 전후해선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변모한다.
안중근 부친과 ‘황해도 신동’이라 불려
국권침탈 후 모든 신문·잡지·언론이 폐쇄되고 선생의 저서도 금서가 된다. 부인과 사별한 선생은 1911년 53세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의 환인현으로 돌아오지 못할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일제가 조선의 국사서적을 수거·폐기하는 현실을 목도한 선생은 “해외로 나가 4천년 문헌을 모아서 편찬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각오였다.
1912년 환인현을 떠난 선생은 중국 각지에서 망명활동을 하는 독립운동지사들과 만나면서 신규식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조직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총재로 선임된다. 1914년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건너가 잡지 ‘향강’의 편집주간이 되어 일제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규탄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향강’ 폐간 후에는 상하이로 돌아와 『안중근전』과 『한국통사』를 탈고했는데 특히 『안중근전』은 해외 한인사회에서 널리 읽혔지만 국내에선 총독부가 금서로 지정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이상설이 본부장, 선생이 감독을 맡았다. 이 단체는 후일 상해임시정부의 토대가 된다. 1917년 신규식, 신채호 등 14명과 함께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단결해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동단결선언’에 서명한다.
1918년 연해주의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한족공보’ 주필로 선생을 초청해 우수리스크로 옮겨가게 되고, 1919년 선생 등 해외각지의 독립운동가 39인은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다. 국내의 3·1혁명 소식을 접한 선생은 즉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활동했는데,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는 동맹단의 라오허현 지부장이었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와 연해주국민의회정부, 상하이임시정부가 통합임시정부로 출범해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됐지만 임정 내부분열 중 1921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다시 떠나버리자 임정은 표류하고 독립운동 전체가 혼란과 분열에 이른다. 1924년 선생은 독립신문사 사장에 취임하면서 사태수습에 나섰고, 이듬해 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탄핵하고 당시 국무총리와 임시 대통령 대리를 겸직하고 있던 선생을 제2대 대통령에 선임했다.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된 임정의 통합을 위해 대통령제를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을 한 후 서로군정서총재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선생은 3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망명생활 중 고대역사연구와 고구려·발해 유적지탐사에 매진한 선생은 한민족고대역사를 밝히는 저술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학에 민족주의사학이라는 큰 기둥을 세우게 된다.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 『대동고사론』 『단조사고』 등 한민족 역사서를 썼고 한민족사의 역사전개 과정이 시조단군에서 고구려, 신라, 발해로 이어지며 금나라와 청나라도 동족이라 논했다. 이로써 단군편년을 4300년으로 비정하고 한민족 영역을 남북만주와 요서·요동까지 확대했다.
67세로 작고, 임정 수립 최초 국장 치러
1915년 발간한 『한국통사』는 우리나라가 망한 배경과 과정을 그린 책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 47년간의 아플 통(痛)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갑신정변 이후 10년간을 내정부재가 극도에 이른 시기라 단언한다. 선생은 민족과 국가를 ‘국혼(민족의 정신)’과 ‘국백(나라의 부강)’으로 구분해 국혼과 국백이 살아있으면 독립하는 것이며 국백을 잃더라도 국혼이 살아있으면 언젠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저서 말미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동포들이 다행히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며, 절대로 이를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라고 맺고 있다.
1920년 일제가 3·1혁명 후 조선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왜곡된 역사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기에 이르자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발간해 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과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이 책은 한민족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투쟁한 역사를 담은 책으로 1884년 갑신정변에서 1920년 국내외 독립전쟁까지 36년간의 한민족독립운동 역사를 서술했다. 또한 한국근대사를 체계화하여 민족주의사학을 열고 신채호, 장지연, 최남선 등으로 이어지게 했다.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4개월이 못되어 병이 악화된 선생은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1925년 11월 1일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공근에게 유언을 남기고 6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되어야 하고,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이를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동지간에는 애증·친소의 별(別)이 없어야 된다.”
임시정부는 임정 수립 후 최초로 국장을 치르고 상하이 만국공원묘지에 선생의 유해를 안장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93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광복군 참모로 활약했던 양자 박시창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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