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털보다 따뜻하다... 개털, 버리지 말고 입으세요
개털로 짜는 ‘시앙고라’
친환경 섬유로 각광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7년째 살고 있는 이건욱(49)씨는 매일매일 개털과 ‘전쟁’을 벌인다. “털이 엄청 빠져요. 하루라도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집 안이 온통 털로 덮일 정도죠.” 성인 남자 주먹만 한 털 뭉치가 매일 나온다. 그는 “일주일 치만 모아도 스웨터 한 벌은 짤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환경에 부담 주는 면·울의 대안
그런데 농담이 아니다. ‘시앙고라(chiengora)’가 지속 가능한 친환경 섬유로 재평가받으면서 개털로 짠 스웨터를 실제로 입는 이가 늘고 있다. 시엥고라는 프랑스어로 개를 뜻하는 ‘시앙(chien)’과 앙고라토끼 털로 만드는 천연섬유 ‘앙고라(angora)’를 합성한 신조어. 서양에서는 ‘도그 울(dog wool)’로 통한다. 이헌 패션 칼럼니스트는 “독일과 미국에서 시앙고라를 생산하는 원사·원단 업체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시앙고라를 사용한 제품도 늘어난다”며 “국내에서도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관심이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개털을 섬유로 활용한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 인류가 처음 가축으로 삼은 동물인 개의 털로 섬유를 만들고 직물을 생산했으며, 양·염소·토끼·낙타 등 다른 어떤 동물보다 앞섰음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아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살리시(Salish) 부족은 오늘날 양(羊)을 치듯 실 뽑기에 적합한 견종(犬種)을 따로 길렀고, 그렇게 생산한 섬유와 원단은 다른 부족과 거래하는 주요 무역 품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염소·면화(綿花) 등 섬유를 훨씬 저렴하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대안이 생겨나자 개털은 인류의 섬유·원단 선택지에서 차츰 사라졌다. 21세기 들어 개털이 다시 주목받는 것은 환경 때문이다. 면을 생산하기 위해 면화를 재배하려면 엄청난 물이 필요하다. 면화 1kg을 생산하는 데 물 2만L가 들어간다. 제초제와 살충제, 화학비료를 많이 쓰는 작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울(양모)을 위해 키우는 양 떼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메테인 가스를 대량 생성한다.
환경 운동가들은 쓰레기로 버리는 개털이 기후 위기를 맞아 기존 섬유 원료를 대체할 만한 친환경 선택지라고 주장한다. 농림식품부 추정 국내 반려견은 2018년 507만여 마리에서 2022년 545만여 마리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시앙고라 원료 확보가 갈수록 쉬워지고 저렴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보온성 우수… 높은 가격은 걸림돌
개털은 섬유 소재로도 우수하다. 200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연구팀이 실시한 비교 실험에서 개털은 가장 튼튼하다는 낙타털보다 강성이 높았고, 보온성을 비롯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울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7년부터 시앙고라를 생산하는 독일 ‘모두스 인타르지아(Modus Intarsia)’ 설립자 앤 카트린 쇤록은 “시앙고라는 최고급 섬유 중 하나로 꼽히는 비쿠냐(안데스 산맥에 서식하는 낙타과 동물과 그 털)보다 가늘고 부드럽다”고 했다.
원단 품질은 개 품종에 크게 영향받는다. 인도 PSG공대의 연구에 따르면, 라사 압소의 가늘고 긴 털은 촉감, 보온성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로 평가받았다. PSG공대 연구팀은 “라사 압소 털 75%에 폴리에스터 25%를 섞었을 때 보온성과 안락감이 최적”이라고 했다. 하얗고 부드러운 사모예드 털이나 차우차우와 버니스 마운틴 도그의 고운 속털도 실로 만들기에 이상적이다. 골든 리트리버와 래브라도 리트리버의 털은 짧고 뻣뻣해 상품성이 떨어진다.
시앙고라를 상업화·대중화하려면 선입견부터 깨뜨려야 한다. 원료가 개털이라고 하면 소비자들이 흑백 점박이 무늬 가죽을 벗겨 코트를 만들려 한 영화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당 크루엘라를 떠올린다는 것. 시앙고라 지지자들은 “최고급 섬유로 꼽히는 캐시미어가 빗질해 얻는 산양의 털로 만들듯, 시앙고라도 빗질한 개털을 사용할 뿐 개를 죽이거나 학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거부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높은 가격은 더 큰 난관이다. 사모예드 털로 짠 원단은 1kg당 420달러(약 54만4000원) 선으로, 캐시미어보다 최고 8배 비싸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앙고라와 울을 섞어 짠 비니(털모자)는 20만~40만원대로, 울·면 등으로 짠 일반 비니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린다. 이헌 칼럼니스트는 “시앙고라의 장점이 알려지고 수요가 늘면 개털을 대량으로 모으는 방법이 고안되고 가격도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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